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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김진선 장군(전 2군 사령관) 별세발인 : 23일(화) 08시, 장지 : 대전 현충원
복덩이웅재 복덩이뉴스기자  |  bok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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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22  16:46:25  |  조회수 : 5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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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에 따르면 예비역 육군 대장 김진선 장군이 20일(토) 23시 30분 별세했다.

향년 75세.

   
김진선 장군
명덕초등학교(42회), 괴산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19기)를 졸업한 김진선 장군은 1970년 맹호사단 수색 중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 인헌무공 화랑무공 훈장을 받았다.

김진선 장군은 12.12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소장) 직속부하로 작전보좌관 겸 상황실장(중령)을 맡고 있었지만, 전두환이 주도한 신군부측에 가담해 하나회로 분류되고 있다.

 장군은 1986년 체육부대를 창설하고, 육군 7사단장(소장), 1990년 10월부터 1991년 12월월까지 수도방위사령관(중장), 육군본부 참모차장(중장), 2군사령관(대장)을 역임했다.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군 숙정 때 대장 진급 두달만에 군복을 벗었다.

그 후 김대중 정부때 김종필 총리 서리 밑에서 국가비상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배우자는 임매자씨. 자녀로는 김해영, 김의영

빈소는 서울 강남 삼성서울병원장례식장 19호

발인은 23일(화) 08시

장지는 국립 대전 현충원

연락처 : 02-3410-6919, 02-3410-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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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기사는 2002년 7월 18일자, 8월 11일자 경향신문 기사 <

“내 훈장은 당신들의 목숨입니다” 

베트남전 희생자에게 사과하기 위해 쓴 한국 4성장군의 참전수기가 베트남어로 번역, 출간됐다.

김진선 전 육군대장(64)의 ‘산자와 죽은 자의 전쟁’이 초대 주한 베트남 대사를 역임한 베트남 외무차관의 번역에 의해 ‘전쟁의 기억’이란 제목으로 최근 베트남 현지에서 나왔다.

17일 하노이 우호친선협회 강당에서 베트남친선협회측이 마련한 출판기념회에서 번역자 응웬푸빙 차관은 “한국과 베트남인 모두가 베트남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 이 책을 번역하게 됐다”고 출판 소감을 밝혔다.

작가인 김장군은 “베트남전쟁은 보는 자들의 위치와 생각에 따라 여러가지 평가가 가능한 만큼 이 책이 베트남인들에게도 전쟁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1969년 맹호부대 전투 중대장으로 참전한 김장군은 “전쟁후 20년 만인 94년 하노이 학술회의에 참가해 처음으로 내가 싸웠던 베트남(당시 월맹)의 실체를 파악,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됐으며 희생자에게 사과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지나치게 베트남측의 입장에서 썼다는 지적으로 참전용사들의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김장군은 육사 19기로 69년 맹호부대 맹호사단 1연대 11중대장으로 베트남전에 나가 인헌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93년 김영삼 정권 때는 2군사령관으로 승진했으나 두달 후 대장으로 예편했다.

1998년 국가비상기획위원장을 역임하고, 2000년에는 민주당 충북 진천·괴산·음성지구당위원장을 지냈다.

〈김윤숙기자·연합 yskim@kyunghyang.com〉 입력 : 2002-07-18 18:22:30

 

 인물캐러밴

“월남전 희생자들에 잘못을 빌고 싶었다”


클레이모어 지뢰를 밟고 쓰러지는 베트콩.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탄. 끝내 버티다 숨지며 내뱉는 외마디소리. 옆에 떨어진 어린 딸의 사진….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 같은 영화 얘기가 아니다.

야전군 중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김진선(金鎭渲·63) 예비역 육군대장의 뇌리에 박혀 있는 장면이다.

그가 최근 베트남어로 ‘전쟁의 기억’이라는 고백록을 내고 하노이에서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월남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비롯, 관심사를 두루 들어보았다.

“당시 희생자들에게 잘못을 빌기 위해 책을 썼습니다. 월남전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국내에서 펴낸 ‘산 자의 전쟁, 죽은 자의 전쟁’을 이번에 번역 출간한 것이라 했다.

10년 전 국교가 맺어지면서 첫 주한대사를 지낸 응웬푸빙 베트남 외무차관이 직접 붙잡고 번역했다는 사실부터가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쪽의 참전 노병들이 책을 읽고는 목메어 울었다고 한다”는 얘기에 어느 정도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육사 19기생인 그가 맹호부대 중대장으로 월남에 파견된 것은 대위 때인 1969년.

최전방인 북부 빈딩성 푸캇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쓰고 ‘산적 두목’을 자처하며 스스로 매복·수색에 앞장섰다.

저들이 ‘따위 킴(김대위)’을 잡기 위해 목에 현상금을 걸었을 정도라니 활약이 어떠했는지 대략 짐작되고도 남는다.

자택 응접실 진열장에 걸려 있는 충무무공훈장을 비롯한 숱한 훈장들도 그의 화려한 전력을 말해준다.

“고백록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종전 후 월남땅을 다시 밟았을 때의 충격 때문”이라고 그는 털어놓았다.

군복을 벗고 예편한 이듬해인 94년의 일이었다. 그곳 전쟁기념관 등을 둘러보며 미국, 프랑스뿐 아니라 중국, 몽골 등 외세의 침략을 두루 막아낸 끈기있는 민족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결국 베트남 민족주의에 생각이 미치게 됐다고 했다. 그 뒤 참전 당시의 일기와 편지는 물론 베트남에 대한 자료를 다시 정리한 끝에 책을 내게 된 것이다.

월남, 월맹 어느쪽에 정통성이 있었느냐 하는데까지 그의 관심은 이어진다.

“우리가 ‘자유 월남’을 위해 싸운다고 했지만 당시 월남 지도자들은 부정·부패했고 독재를 저질렀다”고 했다.

오히려 월맹이 민중의 입장을 폭넓게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뜻이다.

자신이 죽더라도 동상을 세우지 말고 화장한 뼛가루를 국토에 골고루 뿌려달라는 호치민의 유언도 곁들여졌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그들과 맞서 싸웠던 지휘관의 입장에서 결코 쉬운 고백은 아닐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미국의 섣부른 판단이 전쟁을 키웠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자였던 호치민의 손을 잡기만 했더라도 비극적인 참상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우리 참전용사들에 대해 곁눈질로 바라보는 듯한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월남전이 그다지 정의롭지 못했다는 역사적 평가 때문이겠지만 군인들이야 나라의 부름에 따랐을 뿐”이라며 “잘했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입장도 진지하게 배려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참전 부상자 및 실종자에 대해서도 대책을 주문했다. “싸움터로 불려간 군인들에게는 마땅한 보상을 해야지요. 그렇지 못하면 국민은 점차 애국심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월남전의 고엽제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퇴역군인들에 대한 당국의 무관심을 탓하는 듯했다.

6·25 당시 실종된 10만여구의 국군 유해가 아직도 곳곳에 버려진 채이며, 그때의 부상자 300여명이 병석에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을 끄집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부에 대한 그의 불만은 문민정부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군과 민간 사이는 물론 군끼리도 이간질시켰다”며 목청이 높아졌다.

따르던 상관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끌려가는 것을 지켜본 부하들이 과연 군에 대해 얼마나 애착심을 지니겠느냐는 얘기다.

수방사령관, 육본 참모차장 등으로 잘 나가다가 문민정부 들어서자마자 2군사령관으로 밀려나 곧바로 예편한 쓰라린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정부가 바뀐 뒤인 98년에 국가비상기획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최근의 서해교전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이었다. 전사자 유족들이 가슴을 치고 있는데도 고위층의 어느 누구도 영결식장에 나타나지 않은 데 울분을 감출 수 없었던 모양이다.

북한측 위협을 거론하며 “한·미 공조가 없었다면 벌써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미군이 국내에 주둔하면서 갖가지 문제와 잡음을 일으키고 있는 데 대한 걱정을 잊지 않았다. “우리의 요구가 없더라도 미군 스스로 처신을 바꿨어야 했다”며 “그것이 세계 대국으로서 도덕적인 모습”이라고 강조했다.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문제로 화제가 돌려졌다. 취미를 물었더니 스포츠를 두루 꼽는다. 축구, 배구, 농구, 배구, 럭비, 테니스…. 사병들과 어울려 시합을 하더라도 지치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는 머리를 내리박으며 헤딩슛을 하다가 어깨뼈가 부러져 통합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을 정도다. 골프도 핸디캡 6에 드라이버 거리가 270야드까지 나간다니 보통 실력이 아니다.

“어렸을 때 가난했던 덕분에 산나물과 쑥, 개떡을 먹고 자라난 때문”이라며 웃어댔다.

그는 예편한 뒤에도 고려대, 연세대, 외국어대에서 최고관리자과정 등을 차례로 마쳤다. “군인이 되지 않았다면 세계적인 무역업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수필가로 등단한 정식 문인으로 몇해 전에는 ‘에덴의 골짜기’라는 수필집도 냈다. 요즘은 종교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월남전에서 몇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기억이 뒤늦게나마 되살아난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물었더니 “평양 김일성 광장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이란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신군부 세력의 등장으로 격동의 분수령이 됐던 12·12사태에 대한 정확한 진상을 알리겠다는 것.

당시 수경사 상황실장으로서, 지키고 빼앗으려는 양측 세력 사이에 긴박하게 돌아가던 내막을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는 입장이다.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잘못 알려졌거나 가려진 사안이 적지 않다”면서 “그날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있었던 일을 책으로 쓰고 싶다”며 눈길을 창밖으로 돌렸다.

비슷한 무렵 계엄령 아래서 진행됐던 ‘YWCA 위장결혼사건’ 군사재판 얘기는 뜻밖의 소득이었다.

윤보선·함석헌 선생의 형집행정지를 건의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고 했다.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재판관으로 참여하고 있을 때였다.

“재판장을 맡고 있던 노태우 수도지구 계엄사령관께서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서류에 서명했다”고 돌이켰다.

그밖에 백기완 선생을 비롯해 동일방직 파업사태 주도자인 정명자씨, 도시산업선교회 서경석 목사의 재판도 맡았다.

마지막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을 물었다. 지난번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진천·괴산·음성 선거구에 출마했기 때문.

그러나 “육군대장으로 예편했는데 솔직히 더 이상 무슨 욕심이 있겠느냐”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현재 지구당 위원장 자리를 내놓고 탈당한 상태다. “서해사태 직후 민주당이 보여준 모습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선거판에 진저리를 느꼈던 마당이다. “사람들 사이를 원수로 갈라놓는 게 선거”라며 걱정을 드러냈다. 무더운 날씨에 이래저래 복잡한 생각만을 남긴 인터뷰였다.

〈허영섭 gracia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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