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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中道) - 이웅재 괴산신문 연재 '생활수행' 중성철 스님, “중도 = 부처”
복덩이웅재 복덩이뉴스기자  |  bok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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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10  20:34:36  |  조회수 : 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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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불교에 미래가 있다는 확신이 들어 출가(出家)를 하였습니다.

출가수행자가 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시대에 맞는 불교운동을 위해 바로 환속(還俗)하였습니다.

환속한 지 얼마 안되어 괴산신문 이성인 사장(현. 한국문화관광해설사)께서 출가수행자로 있던 때 공부한 것을 괴산신문에 연재해 보지않겠느냐는 제의를 하였습니다.

부담스러웠지만, 나름대로 공부한 것을 정리한다는 기분으로 2003년 2월부터 10월까지 ‘생활수행’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썼습니다.

제대로 여물지도 않은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인 사장께서는 감사패까지 주면서 격려해 주셨습니다. 괴산신문 이성인 사장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래 글은 괴산신문에 연재된 ‘생활수행’시리즈에서 중도(中道) 부문만 발췌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중도(中道)는 워낙 중요하여 예도 많이 들었고, 반복적인 표현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주간 괴산신문은 종이신문이라 그렇게 써도 별 문제가 안되였지만 - 오히려 이해를 돕는다고 칭찬을 받았지만, 복덩이뉴스는 인터넷신문이라 한꺼번에 다 실어도 되어 군더더기 표현을 약간 정리하였습니다.

복덩이뉴스 독자들과 불자여러분의 아낌없는 비판과 질책을 바랍니다.

그리고 매월 2번째 일요일 10:00, 구석산 기원사(주지 호산 스님) 법회에서 부처님 가르침에대해 발제(강평= 권성업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를 하고 있으니, 오프(off)에서 만나고자 하는 독자나 불자들은 기원사 법회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 바랍니다.

- 구석산 기원사 법회 발제자 선덕 이웅재 010-3434-0707

 

   

감사패> 진정 감사패를 받아야 할 사람은 괴산신문사 이성인 사장입니다. 나름대로 공부한 것을 정리해 볼 기회를 주신 이성인 사장님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주간 괴산신문 연재‘생활수행’중
중도(中道) 연구

중도(中道)에 대해(1)

수행에서 제일 중요한 개념이 중도(中道)입니다. 좀 어렵고 난해해도 중도(中道)라는 말의 뜻을 알아야 수행의 맛도 알 수 있고, 수행자들의 표현도 이해 할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행이야기를 어렵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가 수행자들은 항상 중도적으로 말하고, 중도적인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잡보잠경에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교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곳이 존재할까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누구나 유리하면 교만하게 되고, 불리하면 비굴하게 되니까요.

"색(色)은 공(空)과 다르지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않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지 어떻게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 될까하고 매우 궁금해 할것입니다.

수행과 관련된 모든 글은 중도적인 표현이라 아주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중도(中道)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중도(中道)를 '적당한 상태'로 이해하거나, 중도(中道)가 가지는 본래 의미보다는 중도(中道)에서 파생된 사성제(四聖諦)나 팔정도(八正道) 등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먼저 그와 같은 오해가 생기게 된 이유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고타마 싯달타께서 깨달음을 얻은 뒤 - 부처가 되어, 그와 함께 수행했던 동료들을 찾아옵니다. 그때 그와 함께 수행했던 동료들이 고타마 싯달타에게 무엇을 깨달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고타마 싯달타는 중도(中道)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중도는 고행(苦行)에 치우치는 것도 아니고, 쾌락에 치우치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절대고(絶對苦)를 뛰어넘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문제는 중도(中道)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다음 글을 읽게되면 엉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고행과 쾌락의 중간으로 중도(中道)를 이해하게 되면, 수행을 적당하게 하는 것이 중도(中道)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무리하지 않는 수행, 힘들지 않는 수행, 그렇다고 쾌락이 아닌 수행을 하는 것이 중도수행(中道修行)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팔정도(八正道)도 좋은 말의 나열로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정견(正見),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正定),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이라는 말의 깊이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오히려 올바르게 살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말을 끌어들여 반복적으로 이야기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중도(中道)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하나의 사실을 부정한다고 다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실도 거듭 부정하는 데 있습니다. 이중부정(二重否定)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마라는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불리하더라도 비굴하지 마라는 이야기도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교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상태가 존재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또 다시말하면 수행을 하는데 괴롭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은 상태가 존재하는가입니다. 우리 생활에서는 기쁘거나 괴롭거나 그렇지않으면 무감각한 경우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도모함에 있어 교만하거나 비굴하거나 그렇지않으면 무감각한 경우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유리한데 교만하지 않고, 어느 누가 불리한데 비굴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감정에도 편입되지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목석(木石)처럼 무감각한 사람일 것입니다.

누차 이야기한 것처럼 불교는 공론(空論)이나 희론(戱論)이 아닙니다. 수행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수행은 항상 실체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과학적입니다.

그렇다면 중도(中道)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색이면서 공이고, 공이면서 색'인 실체는 무엇일까요.

거듭 부정을 하고 나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중도(中道)를 알아야 수행의 지혜를 알 수 있고, 수행의 지혜를 알아야 세상을 대자대유(大自大由)하게 살 수 있습니다. 중도(中道)를 알아야 가난하면서도 넉넉하게 사는 비법을 알 수 있고, 고난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수 있습니다.

중도적인 표현으로 가득찬 잡보장경에 나오는 글을 읽으며 다시금 중도를 생각해 봅시다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고
자기가 아는 데로 진실만을 말하고
주고 받는 말마다 악을 막아
듣는 이에게 편안과 기쁨을 주어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지나치게 인색하지 말고, 성내거나 미워하지 말라.
이기심을 채우고자 정의를 등지지 말고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말라.

위험에 직면하여 두려워말고
이익을 위해 남을 모함하지 말라.
객기를 부려 만용하지 말고, 허약하여 비겁하지 말라.
사나우면 남들이 꺼려하고, 나약하면 업신여기나니
사나움과 나약함을 버려 - 지혜롭게 중도(中道)를 지켜라!

태산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춰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와 처지를 살필 줄 알고
부귀와 쇠망이 교차함을 알라. 

   

8월 9일(일) 구석산 기원사 법회가 끝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가운데 승복을 입고 계신 분이 주지 호산 스님/ 호산 스님 오른쪽 옆에 계신 분이 권성업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 스님 뒤에 계신 분이 이성인 괴산신문사장(현.한국문화관광해설사)/ 앞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왼쪽부터 원업 박재준(형석중), 박세훈(형석중), 지선행 박재선(증평중)]

★9월 13일(일) 오전 10시에도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중도(中道)에 대해 공부한다.

중도(中道)에 대해(2)

중도(中道)는 이중부정(二重否定)이기 때문에 아주 어렵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중부정이 가능할까요.

중도(中道)를 이해하기위해 우리는 '제논의 역설'을 생각해 봅시다.

아테네 철학자인 제논은 '앞 선 거북이를 뒤 처진 토끼가 영원히 추월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거북이가 있는 곳까지 토끼가 달려가면, 토끼가 달려온 만큼 거북이가 걸어가고, 거북이가 걸어간 만큼 토끼가 쫓아가면 토기가 쫓아온 만큼 또 걸어간다는 것이죠. 그래서 영원히 뒤 쳐진 토끼는 앞선 거북이를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경험적으로 그 논리가 잘못됐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왜 잘못됐느냐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데는 참으로 난감해 할 수 있습니다.

중도(中道)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도(中道)는 지혜이지만, 중도(中道)를 설명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논의 논리에서 빠진 것은 시간입니다. 다시말하면 토끼가 뛴 시간과 거북이가 기어간 시간을 생각해보면 어느 시간이 지나면 추월 한다는 말이죠.

토끼가 1분에 1백미터를 가고, 거북이는 1분에 10미터를 간다면 비록 거북이가 1천미터 앞에 있어도 11분이후에는 토끼가 거북이를 추월합니다.

색(色)과 공(空)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수 있는 모든 것은 색(色)입니다. 색은 물질입니다. 그러나 공(空)은 없는 것입니다. 비어있는 것입니다. 허무입니다.

먼저 제논처럼 이것을 분리해서 생각해봅시다. "나는 젊습니다. 나는 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애인이 있습니다. 나는 땅이 있습니다. 나는 의원입니다. 나는 장군입니다.... "라고 말하면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나는 말하고 있는 이 순간 젊습니다. 100년후에는 젊지않습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100년후 이 차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이렇게 말해야 옳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함께 색(色)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압니다. 지구도 시간과 함께 생각해보면 지금으로부터 45억년전에 만들어졌고, 앞으로 어느정도 존재하다가 없어집니다. 공(空)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사 모두가 공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지금 나(我)라는 실체(色)가 없습니까, 지금 내가 차가 없습니까, 지금 애인이 없습니까. 지금 땅이 없습니까.

색이지만 색이 아니고, 공이지만 공이 아닌 것을 알아야 우리는 실상(實相)을 꿰뚫을 수 있습니다.

앞서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고단한 인생을 삶니다. 부자도 인생의 절대고(絶對苦)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생은 고(苦)만 있고, 낙(樂)은 없나요. 저는 제 친구의 갓난 아기를 끌어안고 있을 때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 녀석이 저를 알아보는 것처럼 방실방실 웃으면 행복에 겨워 눈물이 납니다.

우리 인생에 분명 낙이 있습니다. 애인과 데이트를 하는 것도 기쁨이고, 새 집을 장만하는 것도 기쁨이고, 승진이나 진급하는 것도 기쁨입니다.

그렇지만 기쁨만큼 몰려오는 슬픔이 있습니다. 행복한 만큼 채워지지 않는 허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둘을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같이 볼 수있어야 지혜로와 집니다.

이 행복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오히려 지금 느끼고 있는 행복으로 인해 더 큰 불행과 아픔을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애인이 너무너무 사랑스러우십니까. 그러면 그런만큼 헤어짐의 고통이 크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옆사람 때문에 너무 고통스럽다고요? 헤어짐의 기쁨이 몰려 올것입니다.

수행자는 연꽃을 좋아합니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피지만 흙탕물에 물들지않습니다. 수행자들은 깨끗하고 고고해야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독야청청하는 순결함이 아닙니다. 수행자들은 안먹고 안싸는 돌부처가 아닙니다. 시시비비가 엄중할 때, 양비양시론으로 횡설수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수행자는 항상 문제의 중심에 있어야 하고, 모순의 첨단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눈동자처럼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진리를 설파해야합니다. 수행자는 세상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상사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몸파는 사람이나 교도소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도 갖가지 방법으로 수행을 지도해야 하지만, 거기에 물들면 안됩니다.

인생사를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괴로움도 다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고통이 밀려오면 더 큰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담담히 세상과 사람을 관찰하십시오.

시간과 함께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기쁨도 영원하지 않지만, 슬픔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결국 중도(中道)에서 나옵니다. 중도(中道)로 무장하면 어리석음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음을 물리치면 고단한 인생살이를 깨달음의 과정으로 뒤바꿀수 있습니다.

우리 수행합시다. 지혜의 칼로 무장하여 자기운명의 주인이 됩시다.

   
7월 구석산 기원사 법회에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 발제를 하였다. 

중도에 대해(3)

중도(中道)를 알아야 실상(實相)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실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중도의 눈을 떠야 색(色)이 색이면서 색이 아닌 이유를 알 수 있고, 공(空)이 공이면서 공이 아닌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중도(中道)를 알아야 정도(正道)를 알 수 있습니다. 중도(中道)가 곧 정도(正道)입니다. 정도(正道)를 걷고자하면, 중도(中道)를 알아야 하고, 중도(中道)를 알면 정도(正道)를 걷게 됩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이유는 수행의 개념 중 중도(中道)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개념은 중도(中道)에서 변화발전된 것입니다. 따라서 중도(中道)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면 정도(正道)를 걷게 되고, 정도(正道)를 걷게 되면 수행은 시작된 것입니다.

수행이 시작되면 근기(根基/ 결심과 의지 수준)에 따라 차이는 있어도 세월이 흘러 수행이 무르익으면 모두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도(中道)를 모르고 수행하게 되면 반드시 양극단으로 치달아, 사이비(似而非)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서울을 간다고 하면서 부산으로 가게 됩니다. 첫걸음을 잘못 내딛게 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헛일이 됩니다. 따라서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중도(中道)를 알고, 정도(正道)를 따라야 합니다. 중도(中道)와 정도(正道)에 수행의 길이 있고 수행의 참맛이 있습니다.

수행을 제대로 하려면 신행(信行)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이 스스로를 자각해서 깨달음에 이르려하는 것이라면, 신행은 절대적 존재를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보편적으로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믿습니다. 그래서 때론 당당하고 때론 거만해보입니다. 그러나 신행자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인간의 절대적 한계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절감하고, 자신을 무한히 낮춥니다. 그래서 때론 겸손해 보이고 때론 종처럼 소극적이고 소심해보입니다.

우리는 수행과 신행활동에 있어서도 중도(中道)를 취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힘과 능력을 믿되, 자만하지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위대한 존재에 대해 무한한 경외심을 갖되 의존적이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운명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되, 위대한 인류의 스승에 대해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절대한계에 대해 겸허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행자와 신행자들간의 갈등을 가끔 봅니다.

수행자들은 신행자들의 기복적인 모습에 대해 비판합니다. 신행자들은 수행자들의 거침없는 행동에 대해 경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도(中道)의 눈을 뜨게 되면 갈등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장점이 보입니다. 수행자의 당당함이 보이고 신행자의 겸손함이 보입니다.

더 깊게 들어가면 수행(修行)이 신행(信行)이고, 신행이 수행입니다.

수행을 한다고 스승 없이 ‘되나가나’ 할 수는 없습니다. 수행자에게는 깨달음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 있고, 믿음을 심어준 스승이 있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 속에는 신행이 있습니다.

또한 신행자들이 절대적 존재를 부여잡고 행동하지만 사실은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거저 된다’는 생각으로 신행활동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만히 있는데도 밥이 굴러오지않습니다. 기도만 열심히 한다고 시험에 합격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신행을 통해 생긴 자신감을 가지고 수행을 하여 목표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겉모습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신행속에는 반드시 수행이 자리잡고 있고, 수행속에는 신행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 존재를 인정하고 그 분 앞에서 무한히 겸손해지는 신행활동도 깨달음에 도달하기위한 과정이고, 스스로의 무한한 능력을 믿고 죽자살자 수행하는 것도 다 깨달음에 도달하기위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든 신행자든 서로를 벗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벗으로 삼기위해서는 중도(中道)를 알아야하고, 중도를 알아야 수행자와 신행자의 실상(實相)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알아야 바른 길(正道)을 갈 수 있습니다. 바른길을 가는 사람은 지혜가 넘치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이는 사람을 끌어 당깁니다. 그래서 중도(中道)를 알아야 정도(正道)를 알고, 정도(正道)를 알아야 지혜가 넘치고, 지혜가 넘쳐야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중도(中道)에 대해(4)

중도(中道)를 거듭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수행의 기본개념이 중도(中道)와 연기(緣起)이기 때문입니다. 중도와 연기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중도와 연기에 정통해야 수행을 하고 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도와 연기를 명확히 알지 못하면, 그것은 수행이 아니라 힐링스포츠입니다. 서구사람들이 요가라는 종교를 단지 몸관리하는 스포츠로 만들었듯이 수행도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게 됩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행이 그 정도에 머문다면 수행이 너무 아깝지 않겠습니까. 수행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은 깨달음입니다.

마음을 완벽하게 비움으로써 마음의 장난인 윤회의 사슬을 끊는 것입니다. 윤회의 사슬을 끊으면 하루를 살아도 진정으로 값있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백억을 벌 수 있는 사람이 겨우 십만원벌이에 급급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일입니까.

깨달음은 천만금에도 비유할 수 없는 재산입니다. 그것은 운명과 관련된 궁극적인 해결책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할 만한 일은 당연히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목적을 깨닫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승과의 인연이 다한 후의 문제(죽음)일 것입니다. 이런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해답을 과학적이고 철학적으로 분명히 제시하고 있고,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수행에 한번 인생을 걸만하지 않은가요.

이렇게 멋진 수행을 단지 몸매관리용으로만 이용한다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수행이 스포츠로 전락하지 않고, 자기만족에만 머무르지않게하려면 중도(中道)와 연기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할 때, 항상 중도적인 표현을 사용해야 합니다. 중도(中道)를 알아야 실상을 볼 수 있고 실상을 봐야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넘쳐야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건강 관리도 중도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않으면 건강관리가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 노력해야하지만 우리 몸의 한계에 대해 분명히 알고 대처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늙고 죽습니다. 건강을 위해 아무리 열심히 운동을 하고, 보양식을 먹어도 반드시 늙고 죽는다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알고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마음의 평화도 찾을 수있고 올바른 건강법도 알 수 있고, 늙고 죽는 것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늙고 죽는다고 건강을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사람은 반드시 늙고 죽지만, 건강해야 수행도 할 수 있고 남도 도울수 있습니다. 최소한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병이 오래면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해도 늙고 죽는다는 사실을 동시적으로 생각해야합니다. 그렇지않으면 늙음과 죽음앞에서 건강이고 뭐고 다 잃고 그저 망연자실하게 무너질수 있습니다.

거듭말씀드리지만 중도(中道)를 알아야 실상(實相)을 제대로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도속에는 묘한 함정이 있습니다. 중도 또한 중도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변명과 허무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늙고 죽는 것은 분명한 이치인데, 무엇하러 귀찮게 건강관리를 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동시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그만 자기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죠. 색(물질)은 색이지만 색이 아니고 공은 공이지만 공이 아니다. 따라서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입니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면, 다시 색은 색이다라는 설명이 됩니다.

그러면 골치아프게 색은 색이고 그러면서도 공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결론은 '색은 색'이니까요. 건강한 사람도 늙고 죽고, 골골하는 사람도 늙고 죽는다면 뭐하러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냐는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결론은 똑같이 죽는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수행에서 깨달음이라는 목표가 없으면 수행을 통해 완벽한 몸매를 얻었다해도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절을 해도 그것은 자기만족에 머물게 되고, 아무리 정근을 열심히 해도 소승의 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불가의 완벽한 수행자 고타마싯달타가 맨처음 중도(中道)를 이야기한 이유는 중도가 바로 수행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나침반을 가지고 가야 정확한 방향으로 갈수 있습니다. 수행의 정확한 나침반이 중도와 연기입니다. 그 외 표현은 다 미사여구입니다. 중도와 정도를 상황에 맞게 사람들의 근기에 맞게 그 민족의 문화에 맞게 설명한 것입니다.

나침반이 정확하다는 확신이 생기면, 그 다음부터는 죽자살자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대로 수행하면 됩니다. 그러나 고장난 나침반으로 가면, 처음 차이는 아주 작다해도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차이가 됩니다(호리유차毫釐有差/ 천지현격天地懸隔). 영어를 공부하고자하는 사람이 러시아를 공부하는 식이 됩니다.

중도에 대한 명확한 이해로 우리모두 지혜와 수행으로 만들어진 튼튼한 배를 만듭시다. 그리고 고해(苦海)의 바다를 건너 마음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가 충만한 피안의 세계로 갑시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가자 가자 이제 가자, 피안의 세계로,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중도(中道)에 대해(5)

수행개념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 중도(中道)입니다. 그렇지만 중도(中道)라는 최고, 최상의 개념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이 함정에 빠지면 중도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중도는 무서운 양면의 칼입니다.

중도적으로 생각하거나 안하거나 현실은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중도적이여야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을 보지 않아도 우리는 현실에 존재한다는 데 함정이 있습니다.

'산은 산, 물은 물(山山, 水水)'이라는 유명한 수행명언을 보고 몇사람이 감동을 받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도적으로 생각하면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지만, 제대로 보지 않아도 우리는 현실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중도(中道)라는 최고, 최상의 개념에 대해 무시할 수가 있습니다.

사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고 볼수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하루가 지나가는 것은 죽음의 입장에서 보면 하루 더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수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하루가 지나가는 것은 하루 더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든 저렇게 이야기하든 지금 이 순간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곰곰이 따져도 살아있는 것이고, 아무 생각없이 멍청하게 있어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충대충 살아갈 수 있는 배짱(?)이 두둑하게 있는 것이죠.

옆사람이 죽고 앞사람이 죽고 뒤사람이 죽어도, 죽음을 현실로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죠. 언제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느냐면 내가 죽어갈때입니다. 간혹 몸이 무척 아프고 피가 솟구쳐 죽음이 눈앞에 어른 거릴 때는 삶과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만, 저승사자가 돌아가자마자 우리는 죽음을 까맣듯하게 잊어먹고 언제 그랬느냐며 제멋대로 살게 됩니다.

중도의 함정에 빠지면 머리 쓰는 것을 싫어하게되고 자신과 세상을 연구하기 싫어합니다. 하나 안하나 같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과 그렇지않은 사람은 전혀 다릅니다. 존재방식은 같다고 해도 가치추구는 다릅니다.

오늘의 쾌락을 위해 사는 사람과 내일의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은 다릅니다. 쾌락의 끝은 허무지만 희망의 끝은 깨달음입니다. 쾌락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쾌락전도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히로뽕이나 대마초같은 것이 생활필수품처럼 취급될 것입니다.

1989년경 누나애기 돌이라 서울누나네 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귀했던 자몽이라는 외국과일이 탐스럽게 식탁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누나가 직접 가락동 농수산물시장가서 사왔다고 했습니다. 막 자몽을 먹는데 저녁9시 뉴스에서 자몽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됐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 누구도 자몽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누나가 울상이 되어 괜찮다고 했지만 그 누구도 손하나 까딱 하지 않았습니다. 누나가 너무 안돼 저만 자몽을 먹었는데, 그 자몽맛이 소태씹는 것보다 더 씁쓸했습니다. 배가 무척 고팠지만 전혀 맛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간 속만 조금만 아파도 혹 암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으로 고통받았습니다. 발암물질이 검출됐다는 보도전후로 자몽맛이 왜 그렇게 차이가 났을까요. 보도 전이나 보도 후나 그 자몽이 그 자몽입니다. 그러나 보도 전 자몽은 신기한 외국과일이였지만, 보도 후 자몽은 암이 생길지 모르는 외국과일이였습니다.

희망이 없는 삶은 죽음과 같습니다. 중도(中道)는 희망입니다. 중도(中道)를 아나 모르나 똑같은 세상이지만, 중도(中道)를 아는 경우에는 지혜가 생겨 세상을 재미있고 신나고 기분좋게 살 수 있습니다(이고離苦/ 득락得樂)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음을 뛰어넘는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뛰어넘으려고 하는 일체의 행위가 수행이고 깨달음의 과정입니다. 예습을 하고 수업에 임하는 학생은 수업시간이 기다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수업시간이 재미있고 신나고 선생님말씀도 더 잘 들릴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않을뿐만 아니라 인생사 최대의 문제인 죽음앞에서 당당한 자신을 그리며 저승사자에게 도전장을 내밀 것입니다. 죽음앞에서도 자유자재한 사람이 현실생활에서는 어떨까요. 고등수학을 척척 푸는 사람이 초등학교 산수를 풀면 어떨까요.

우리는 끈질기게 연구해서 중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도속에 자신을 집어 넣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중도라는 용광로속에서 지혜와 깨달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중도를 알아야 수행을 아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중도, 생각이 없는 중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네 인생이 단지 죽지않았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면 중도를 배워 마음의 장난인 윤회에서 벗어납시다. 그리하여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만듭시다.

   
 

중도에 대하여(마지막회)

중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수행의 논리를 이해할 수 없고, 세상의 지혜를 원리적으로 깨닫기 어렵습니다.

중도를 이해하면 세상의 지혜를 한 그물에 담을 수 있지만, 중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세상의 지혜를 하나하나 주워 담아야 합니다.

물고기를 그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손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농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사를 지어봐야 하고, 노인을 이해하기위해서는 노인이 돼 봐야 하고, 여성을 이해하기위해서는 여성이 돼야한다는 것입니다.

어부는 농민을 이해할 수 없고, 젊은이는 노인을 이해할 수 없으며, 남성은 여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논리에 빠집니다.

개별성에 국한 되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인 논리에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동체대비(同體大悲)는 의미가 적습니다. ‘나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무슨 대자대비(大慈大悲)를 기대하겠습니까.

색(色)을 색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어찌보면 단순한 사람이지만 어찌보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색을 보면서도 공(空)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중도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며 수행을 이해하고 있은 사람입니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필라국의 왕자로 있었을때, 그는
“어리석은 이들은 남이 병든 것을 보면 싫어하면서도 자기를 돌보지 않는다.
병은 피할 수 없고, 언젠가 자신도 병들 것이면서도 병든 사람을 싫어한다.
그러나 나는 병은 피할 수 없고, 언젠가는 나도 병들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병든 사람을 싫어해서는 안된다.
나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지금 병들지 않았다고 해서 자만하면 반드시 자멸할 것이다.
또 어리석은 이들은 늙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면서도 늙은이를 싫어하고 자신의 일은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늙는 것은 피할 수 없고 언젠가는 늙을 것을 알기때문에 늙은이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와 같기 때문이다.
지금 젊고 앞날이 창창하다고 해서 자만하면 자멸할 것이다.
어리석은 이들은 지금 병들지 않았기때문에, 건강하기 때문에, 젊고 앞날이 창창하다고해서 멋대로 생활하고, 욕망에 맡겨 어리석게 행동하며, 수행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고 생각하여 커다란 깨달음을 구해 불가(佛家)의 위대한 수행자로 길이 그 수행법을 전하고 있습니다.

중도는 이중부정(二重否定)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젊지만 젊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여성이지만 남성을 볼 수 있고, 건강하지만 병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도를 통해 마음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찾으시길 간절히 기원하며, 이만 중도에 대해 마치겠습니다.

다음호부터는 중도와 함께 수행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연기법(인연법, 인과법, 상의상관법)에 대해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선덕 이웅재 은사 스님> 숭산국제선원 계룡산 무상사 부주지 현공 큰스님
   
부처님 가르침에 관한 한 누구보다 출중하지만 천진불(天眞佛)같은 스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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