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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자> 선광 이웅재 법문을 듣고 .."중도수행으로 대보살이 되자!"
신경자 복덩이뉴스기자  |  sinnogoji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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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11  15:37:12  |  조회수 :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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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남차리에 있는 구석산 기원사(주지 호산 큰스님)는 집에서 가까워, 찾아가는데 부담이 가지 않아 좋다.

7월 12일(일), 오늘은 웅재형이 기원사 법회에서 발제는 하는 날이다. 말이 발제지 실제는 법문을 하는 날이다.

법석에 앉은 모습을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형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법석에 앉게 해 준 호산 큰스님도 대단해 보였다.

법문을 듣기까지 시간이 남아 가림막 아래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이 공간이 참좋다. 기원사를 명당으로 만드는 곳^^

   

법문하는 이웅재(선광) 증평수행불자회 사무국장

- 이 사진 출처 : 박재선 복덩이뉴스 학생기자

 

법석에 앉은 웅재형은 부처님 가르침을 전한다는 책임감이 진하게 묻어났다.

최선을 다해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게 남아 있다.

나는 모태신앙인이였다. 모태신앙인답게 27살까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이때 나의 마음속에는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고, 다른 삶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렸을적 우리동네(구. 천주교 주택)에 절이 있었다. 스님이 친구 아버지셨고, 그 스님이 우리 아버지랑 친구셨다. 그래서 자연히 자주 절에 들러, 점심을 먹곤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것이 친구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절에 가보면 친구가 연꽃위에 아름다운 여인이 있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돌아가신 엄마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정말일까? 거짓말 아냐? 어린나이에 믿겨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기독교가 최고이고, 절은 우리보다 낮은 수준 - 미신이라 생각했었다.

오늘 웅재형이 말한 것처럼 불교는 전통을 거의 그대로 잇고 있어서 낡고 보수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생각됐고, 서구에서 왔다는 기독교를 믿어야 선진적이며 현대적인 문화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 동네 목사딸들이 미국으로 입양되었는데, 나도 미국으로 입양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 ...

27살, 성당을 떠나 수행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불교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말이 가슴에 꽂혔다. 나의 신앙생활은 모태신앙인이여서 그런가 “믿습니까?” 하면, “믿습니다!” 하는 수준이라 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는 주님의 종이기 때문에, 주님에게 대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언제나 순종의 미덕을 강조했고,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그리고 주님이외에는 우상이기에 기독교이외에는 다 터부시하였다.

선과 악,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 - 늘 그런 말을 듣다보니 이분법적 사고가 몸에 배었다.

악이 없고, 선만 있는 세상! 악마는 없고 천사만 있는 세상을 위하여 나름대로 교회의 가르침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

20대 후반, 진취적인 삶을 살려 몸부림치는 나의 열정에 비과학적, 비합리적, 맹목적인 가르침과 강제적인 순종은 마음속 거대한 걸림돌이 되었다.

걸림돌으로 맘고생을 심하게 하던 어느날, 나의 삶은 끝장이다고 느끼던 어느날, 바람결에 우연히 들은 말이 새로운 광명으로 나를 인도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 사람들을 번뇌망상으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 말에 부처님께 마음이 숑~ 하고 갔고, 점점 부처님 가르침에 심취하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천5백년전 부처님은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주장한 진보적인 성자이시다. 그 분은 당시 인도의 크고 작은 나라들의 왕들에게 거듭 민중본위의 자비로운 정치를 설했으며, 재물의 독점이나 편중을 경계하고 균등한 베품과 보시를 강조하셨다.

불교 경제윤리의 중심은 분배에 있다.

획득한 이익은 4분해서 그 하나는 의식주의 생활비에, 또 하나는 다음의 경제활동을 위한 회전 자금으로, 또 하나는 저축과 고용인의 급여로 충당하고, 나머지 하나는 베풀어 주라고 한다. 이를 4분법(四分法)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법에 따라 얻은 부는 나누어야 한다. 그러면 근심이 없다. 주기 전에는 마음이 즐겁고, 주고 있을 때에는 마음이 청정해지며, 주고 나서는 마음이 기쁘다.”고 설하셨다.

법석에 앉는다는 것은 쉽지는 않은가 보다. 형이 일상에서 이야기할 때, 나쁜 습관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하며 들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경향, 감정이 상하면 언성이 높아지고, 얼굴이 굳는 둥 ... 그런데 준비를 많이 해서 그런지, 여유도 느껴지고, 얼굴에 웃음을 띠며 온화하게 하려는 노력이 보여 안심이 됐다. 단, 선사들의 예화를 중간 중간 더 많이 들려준다면 좀 더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이 되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은 함께 낭독해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이다.

점심공양으로 비빔밥을 먹었다. 맛이 참 좋았다. 손맛과 정성이 깃들여진 때문이 아닐까?

고마웠다. 공양이 끝나고 바쁘신 분들은 먼저 가시고, 남은 우리는 호산 스님의 제안에 따라 가림막 아래에 있는 방에 갔다.

이 방은 초파일처럼 많은 신도들이 왔을 때는 공양간이 되고, 필요한 사람들에겐 빌려주기도 하는 곳이다. 노래방기계가 있어, 즉석에서 불자노래방이 되었다.

박동복 불자의 ‘동백아가씨’가 히트를 쳤다. ‘헤일수 없는 수많은 밤을~~’ 이 가사가 맘에 들어 애창가요가 됐다고. 박동복 불자는 그 수 많은 밤을 종묘연구에 매진했던 열정과 닮은 가사라고 했다. 우리는 ‘동백아가씨’부분이 나올때마다 ‘동복아저씨’라 소리쳤다.

최연소 참가자 수자타도 애창곡 ‘곰세마리’를 불렀다. 볼수록 어린 나이답지 않은 거침없는 행동이 입을 벌리게 한다.

불자노래방에서 노래하니 재미있었다. 앞으로 법문이 끝나고 난 뒤, 종종 불자노래방에서 여흥을 즐기는 것도 좋겠다. 노래도 부르고, 맛있는 간식도 먹고, 그 날 법문에 대해 서로 이야기도 나누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 박재선(지선행)이 없는 게 아쉽다. 법문 듣고 공양 후, 일이 있다며 떠났다.

초.중.고등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불교프로그램이 있어야겠다. 박상은(무외등)씨가 제안한 ‘ 학생 여름/겨울 불교학교’는 아주 좋은 생각이다.

정혜사 혜산 큰스님은 ‘불교로 가는 길’에서 불교는 다른 종교처럼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절대자에 의지해서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여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모든 현상을 해석하려는 지혜의 종교라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길 위에 있다. ‘불교로 가는 길’ 위에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을 통해 내 것으로 하고 싶다.

힘들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매달리고, 힘이 날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는 보살이 되고 싶다.

만중생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대보살이 되고 싶다.

   
 
7월 12일(일) 법회에서는 혜산 큰스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복습하는 시간이였다면 8월 9일(일) 법회가 진짜 법문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였다.

이날 법문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중도(中道)에 대해 공부했다.

중도(中道)라는 말은 많이 들어서 잘 아는것 같은데, 막상 이야기하라고 하면 똑 부러지게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더 귀 기울여 듣게 되었다. 박재선(지선행) 학생기자의 복덩이뉴스 기사때문인지 참석자들도 많이 늘었다. 박재선(지선행) 학생기자는 복덩이뉴스에 참가기를 썼는데 법문이 무척 재미있었다고 했다. 박수도 열심히 쳤다고 ... 자기가 법문을 끝까지 들은 것은 처음이라고 ... 무척 대단하고 재미있는 법문이라고 썼다.

그런데 정작 법문내용은 없다. 어떤 법문일까 무척 궁금하게 만드는 글이다. 티져광고(Teaser廣告) 같은 글이다. 참석자들이 많으니 분위기도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힘이 나는 분위기였다.

법문이 끝나고, 법문에 대한 소감을 서로 돌려가며 이야기하였는데, 어떤 불자는 ‘중도(中道)에 관한 책을 보았는데도 이해가 어려웠는데 오늘 법문을 통해 이해할 수 있어 눈물이 나도록 기쁘다.’고 고마워했다.

나름대로 오늘 들은 법문을 정리해보면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중도(中道)는 ‘중간 길’ 또는 좌우에 치우지지 않는 ‘한가운데’라는 식의 중간주의나 타협적인 중용(中庸)이 아니다.

중도(中道)의 ‘중(中)’이란 팔정도의 ‘정(正)’, 즉 바른 길이라는 뜻이다. 이는 실제 인간생활에 적용되는 요긴한 도리로서,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닌 정도(正道)를 말하는 것이다.

중도의 ‘중’은 양극단을 다 같이 보면서도, 양극단을 다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정견(正見)이 나오는 것이다.

인간들이 대립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생사, 고락, 승패. 선악 더 나아가 나·너라는 것은 모두 둘이 아닌 하나이다. 다만 인간이 이를 둘로 갈라서 차별을 할 뿐이다.

또한 중도(中道)란 있는 그대로 보되(중도실상), 걸림(선입견·편견 등)이 없어야 한다. 걸림이 있다면 이론적으로 중도를 안다고 해도 중도수행을 통해 중도실상을 보는 것은 아니다.

참 좋은 법문이지만, 걸림없는 상태로 모든 것을 대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갓 태어난 아기가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천진불(天眞佛)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이 걸림이 없는 상태가 아닐까?

말을 하고 성장하면서 점점 걸리는 것이 많아지고, 선입견/ 편견으로 상대방을 쉽게 재단하고, 내친다.

법당에는 어르신들과 더불어 중학생 박재준(원업), 박세훈, 박재선(지선행), 3살 수자타까지 법문을 듣고 있다.

아이들이 절에서 부처님법을 함께 들으니 기뻤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절에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아빠가 교회에 다니기 때문이다.

어느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종이 되는 삶을 살것인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것인가?’

나는 아이들에게 주인이 되는 삶을 바란다. 그래서 절에 같이 가고 싶고, 같이 법문을 듣고 싶다.

이것이 남편과 살면서 큰 갈등 중 하나이다.

남편은 나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당신은 감동이 없어!’라고 ... 그러면 나는 바로 ‘그런 당신은 감동이 있어?’

남편의 그런 말은 기분을 무척 나쁘게 한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지?

법문중에 이웃을 도반으로 삼고, 역경보살로 삼아 수행하는 것이 중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지금 남편이 역경보살이다. 끝장을 내고 싶다. 그런데 남편을 역경보살로 삼아 중도수행을 한다?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인가. 지금 나의 화두이다.

중도적 삶으로 감동을 주면, 남편은 변할까?

오늘 법문을 듣고, 중도적 삶을 살것이냐 말것이냐 고민하며 기원사를 내려왔다.

다음달에는 중도수행, 중도실상에 대해 공부한다.

다음달이 간절히 기다려진다.

   
5월, 도반들과 서울 봉은사*조계사 성지순례
   
7월 모악산 금산사 성지순례
   
9월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성지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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