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덩이뉴스
널리 알림^ ..우측정보면
"불교와 정치" - 구석산 기원사 법회 발제문매월 2번째 일요일> 오전 10시, 구석산 기원사 대웅전
복덩이웅재 복덩이뉴스기자  |  boknews@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9.15  15:51:54  |  조회수 : 12842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정혜사 주지 혜산 법조 스님이 엮은 '불교로 가는 길'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은 불교, 제2장은 인간, 제3장은 불(佛)ㆍ보살(菩薩), 제4장 교리, 제5장 수행입니다.  '불교와 정치'는 제1장 10번째 글. 아래는 혜산 법조 스님이 엮은 '불교와 정치' 전문입니다.

   
기원사 주지 호산 큰스님
10. 불교와 정치

석존 당시 인도에는 도시사회가 발달하고 인격의 존엄과 평등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도 작용했겠지만, 석존은 중의(衆議)에 의한 공화제를 권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신(神)들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 국가를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석존은 한 나라의 왕은 대중이 추대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토지의 사유제도가 정착하면서 서로 경제 문제로 분쟁이 생겼을 때, 시비(是非)를 가려줄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중이 그런 사람을 추대한 후 그로 하여금 토지를 총괄적으로 관리케 하고 밭을 지키고 대중을 보호하며 선악을 가려 상벌을 내리게 하는 대신 지세(地稅)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국가의 기원인 것입니다.

결코 신(神)적인 권위가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국왕과 국가의 권력행사를 정당화해서는 안되며 오직 대중의 보호라는 숭고한 직책을 자각해야 하며, 재물을 독점함으로써 대중이 곤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국가도 왕도 법에 따라야 합니다. 법이란 인륜의 규범입니다. 국왕과 국가는 순리로써 민(民)을 다스려야 하며, 국가 경제의 기초를 확립하고 힘으로 민중을 해쳐서는 안되며, 죽이거나 괴롭히지 말아야 하며, 자비의 정신으로 민(民)에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섭법(四攝法)에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보시(布施) : 분배가 고르게 이루어져야 하며, 애어(愛語) :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 화합해야 하며, 이행(利行) : 선행으로 대중을 이익되게 해야 하며, 동사(同事) : 상대편 처지에서 이해하고 함께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성내는 마음을 내거나 짜증을 내서는 안되며, 무력은 극력 삼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곧 자비의 정치이며, 민중을 위한 정치라는 것이 석존의 정치관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켜야 할 일, 법(法)을 가르치고 그 법을 지키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석존이나 스님의 역할인 것입니다.

자비란 무엇이며, 평등하고 합리적 분배란 어떻게 하는 것이며, 사심 없는 무아(無我)의 정치란 어떤 것인가를 제시해 주는 것이 종교가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석존께서는 이런 생각으로 국가나 권력의 밖에 서서 국가를 번영으로 이끄는 일곱가지 법[칠불망국론(七不亡國論)]을 설하셨습니다.
첫째/ 자주 모여 바른 일을 서로 의논하여 몸소 지켜야 하며,
둘째/ 임금과 신하가 화목하고 윗사람과 아래사람이 서로 공경해야 하며,
셋째/ 법을 받들어 삼가고 예의를 잘 지켜야 하며,
넷째/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순종해야 한다.
다섯째/ 조상을 공경하며 제사를 잘 지내야 한다.
여섯째/ 부녀자들이 정숙하고 진실하며 음란하지 않아야 한다.
일곱째/ 수행자를 공경하고 계행이 청정한 이를 존경하여 보호하고 공양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민주적 합리체제, 동참의식, 법치와 준법, 효, 경조와 전통 존중, 성(性)적 안정과 질서, 종교의 보호와 정신적 지도자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민주적 정치체제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러한 석존의 정치적 이상은 후일 아쇼카왕이 현실 정치로서 구현시킨 예도 있으며, 오늘날 현대인이 추구하는 이른바 민주정치의 기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무 이수자타 어린이수행자 호소, "불자들은 모여라~.~"
-------------------------------------------------------------------

아래 글은 홍석현 중앙미디어네트워크 회장이 2014년 10월 25일 미국 허핑턴포스트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월드포스트에 ‘부처님이시라면 북한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불교의 ‘마음챙김’과 외교’라는 기고문을 중앙일보가 기사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글은 홍석현 회장의 기고문 전문입니다.

홍석현 회장의 기고문을 실은 이유는 정토사회를 만드는 것은 출가수행자들만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예시문으로 보여주기위함입니다.

재가수행자들도 자신의 처지에서 늘 “부처님이시라면~”이라는 물음을 갖고 살아야합니다.

“부처님이시라면 지역발전에 대해 무어라 말씀 하셨고, 어떻게 실천하셨을까?” “부처님이시라면 지금의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셨을까?” “부처님이시라면, 어떻게 노인복지문제를 해결하셨을까?” “부처님이시라면, 어떻게 노사문제를 해결하셨을까?”하는 질문을 가지고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불자들끼리 자연스레 대화가 되고, 실천이 되어야합니다.

불교는 전파과정에서 폭력이나 전쟁을 수반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출가수행자들뿐만아니라 재가수행자들의 크나큰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래 홍석현 회장의 글을 싣는 것은 바로 재가수행자들이 자신의 모든 문제에 대해 “부처님이시라면 ...”이라는 질문을 던져 보시라고 예시를 든 것입니다.

예시가 너무 어렵다는 지적이 있어, 기고문의 기사까지 실었습니다.

예시문이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예시는 어디까지나 예시라고 생각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다시한번 정치분야뿐만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일하고 계신 재가수행자들의 분발을 당부드립니다.

불교 가치인 균형·조화서 외교 갈등 실마리 찾아야

홍석현 중앙미디어네트워크 회장이 25일 월드포스트와 미국 허핑턴포스트,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에 ‘부처라면 북한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불교의 ‘마음챙김’과 외교’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주미대사를 지낸 홍 회장은 이 글에서 오늘날 북한·시리아 등 외교적 갈등의 매듭이 풀리지 않는 배경을 “경쟁을 핵심 원칙으로 상정한 서구의 외교 전통”에서 찾았다.

   
허핑턴포스트(www.huffingtonpost.com)에 25일 게재된 홍석현 회장의 기고문
홍석현 회장 허핑턴포스트 기고
‘불교의 마음챙김과 외교’ 제목
서구 패권주의외교에 대안 제시

홍 회장은 “서구 외교사에서 패권을 차지하려는 나라는 승자독식의 투쟁으로 다른 나라를 이겨내야 했다”며 “그런 시각이 오늘날과 같은 전 지구적 공동체 시대에 적합한 것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어 불교의 근본 가치인 균형과 조화에서 외교 갈등의 실마리를 찾을 것을 제안하며 불교가 “상호 연결된 세계의 외교적 도전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 관여(engagement) 전략을 제시한다”고 설명했다.

 홍 회장은 대북외교에 대해서도 이런 불교적 가치를 적용해 “북한의 핵무기 제거와 같은 한 가지 목표에 집착하지 말고 보다 장기적이고 균형 잡힌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구체적 방법론으로 불교의 ‘마음챙김(念·mindfulness)’과 ‘중도적 균형(balance)’을 들었다.

“감정과 에고(ego) 없이 중립적이고 차분한 마음의 상태인 무심(無心)을 통해 상대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며 “조화의 추구를 목표로 삼으면 전에 상상도 못했던 해결책을 발견하게 된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주미대사 시절 “북한을 신뢰할 수 없다”며 대량살상무기 장소 공격과 체제변화 등의 압박을 주장하는 미국인을 설득한 경험 등을 예로 들며 “마음챙김과 중도적 균형이 국제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알았다”고 강조했다.

“윈윈(win-win) 가능성을 창출하고 극단의 선택을 피할 때 의미 있는 방식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논점으로 “세력 균형이 아닌 관점의 균형”을 제시한 것이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북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부당함 뒤에 있는 보다 큰 제도적·문화적 문제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충동적인 대응으로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홍 회장은 또 바둑과 체스의 차이점을 들어 동서양 외교의 차이점을 짚었다.

상대방의 왕을 쓰러뜨리는(checkmate) 게 승리인 체스와는 달리 바둑에선 “완전한 지배를 가정하지 않으며 성공은 조화와 균형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어 ‘균형’이 곧 강대국 간 세력 균형의 다른 말이었던 서구 외교 전통과는 달리 균형을 근본적 가치로 삼은 불교와 동양에선 힘이 아닌 관점의 균형과 함께 공존·공영을 중시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기고문의 한국어 전문은 중앙일보(joongang.co.kr)와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웹사이트(www.huffingtonpost.kr)에, 영어 원문은 허핑턴포스트(www.huffingtonpost.com)와 월드포스트(www.theworldpost.com)에 게재됐다.

중앙일보 전수진 기자

   
 
====================================================================

“부처라면 북한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 불교의 ‘마음챙김’과 외교
How Would the Buddha Handle North Korea?
‘Mindfulness’in Diplomacy

오늘날 외교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이라크나 시리아 같은 곳에서 제기되는 도전은 너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는 근본적인 데서 잘못된 것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전 지구적인 통합의 이 시대에 심각한 외교적 긴장과, 가끔은 잔혹한 충돌까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될 수가 있다. 문제의 일부는 17세기 이래 국제 전략을 지배해온 서구의 외교적 전통의 근본적인 전제에서 유래한다.

국제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서구식 사고의 틀은 경쟁을 핵심적인 원칙으로 상정한다. 서구 외교사의 전개에서 당연시된 게 있다. 패권을 차지하려는 나라는 승자독식의 투쟁으로 다른 나라를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각이 기후변화 같은 공동의 관심사가 있는 전 지구적 공동체 시대에 적합한 것일까. 모든 국제적 교환 관계가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홉스적인 세계에서 이뤄져야만 하는가.

내 외교 경험에 따르면 도교, 힌두교, 그리고 무엇보다 불교와 같은 동양의 철학적 전통이 외교에 대한 대안적 접근법을 제공한다. 불교는 경쟁 대신 조화를 강조한다. 또한 불교는 상호 연결된 세계의 외교적 도전에 대응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구체적인 관여(engagement) 전략을 제시한다.

선악 구도 넘어서는 게 인간 관계

불교적 접근법은 인간이 항상 협력만 하는 존재라고 순진하게 전제하지는 않는다. 불교는 모든 상황에서 진정한 진보를 달성할 잠재력이 있는 통찰력을 선사한다. 그러한 가능성은 관계의 이중성과 복합성을 살필 때에만 포착할 수 있다. 우리는 도처에서 선악 구도에 따라 단순화된 느낌을 전달하는 매체의 보도에 접한다. 이들 보도가 묘사하는 세계에는 암묵적으로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의 해석 틀이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인간 관계의 심층 패턴은 그런 선악 구도를 넘어선다.

많은 사람들에게 외교란 무자비한 패권 게임이다. 그들에게 조화란 국가의 행위를 전략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필요한 ‘입에 발린 말’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화가 실제로 외교의 목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분명한 것은 국가 간의 조화라는 개념이 서구의 외교적 전통에서도 전혀 낯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를 달성하기 위한 외교적 목표는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는 평화적인 질서라는 염원에 호소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런 은유적 호소에도 불구하고 ‘협조’는 완곡한 표현에 불과했다고 이해하는 게 낫다. ‘협조’는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강대국들이 약소국 문제에 내릴 처분에 붙인 유쾌한 용어였다. 한 역사가의 말을 빌리자면 ‘유럽 협조 체제’가 말하는 조화란 “실제로는 강대국들이 자기들끼리 합의한 바를 강압적으로 약소국들에 강요하는 것”을 의미했다.

불교는 국제관계에 대한 그런 패권적 접근법이 간명한 존엄성과 조화에 대한 헌신보다 덜 효과적이라고 본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의 밑에는 보다 깊은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 조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상징성 있는 한 걸음 한 걸음으로 전진하며 실천한다면 국제정치에 대한 논의의 본질 자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

체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서구의 전략가들은 국제정치가 제로섬의 틀에서 움직인다고 본다. 상대편 말들을 하나씩 가져오다가 종국엔 왕을 ‘체크메이트’한다. 영어 단어 ‘checkmate’의 근원적 유래는 “왕이 죽었다”는 페르시아어 표현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제관계가 놀이라면, 동양의 접근법은 보다 품위가 있다. 공존과 공영의 가능성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웨이치(圍棋), 일본에서 고(碁)라 불리는 바둑은 서양의 체스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바둑은 경쟁 상황에서도 적의 무자비한 제거가 아니라 상호 조화를 추구한다. 바둑에도 승자는 있지만, 바둑은 무수한 게임 양상이 마치 춤출 때처럼 무수히 펼쳐진다. 완전한 지배를 가정하지 않는다. 바둑에서 성공은 조화와 균형의 산물이다.

조화와 마찬가지로 균형이라는 은유는, 서구의 외교적 전통에서 오랫동안 외교의 한 가지 기예로서 자리를 차지해왔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의 개념은 유럽 강대국 간의 국제관계에서 지침 구실을 했다. 이 원칙에 따라 외교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동맹관계와 국제 문제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를 엮어냈다. 한 나라나 블록의 패권 부상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외교가 추구한 균형의 본질은 이상할 정도로 한계가 있었다. 이 접근법은 오로지 기성 강대국 클럽의 목표와 이익에 도움을 줄 뿐이었다. 유럽 내 패권다툼이나 식민지 쟁탈전에서 다른 국가와 국민은 졸(卒)이나 판돈 구실을 할 뿐이었다. 게다가 균형의 원칙 자체를 바람직한 목표나 지침으로 여기는 나라는 없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균형은 깨졌다. 균형이 깨지면 균형을 복원하는 게 항상 필요했다.

균형은 게임에 참가하는 경쟁자들이나 적들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막는 수단이었다. 여기서 목표는 상대적 지위·권력의 서열에서 꼭대기에 도달하고 다른 경쟁국들의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유럽의 국제관계에서 유지되는 균형은 불안정한 균형이었다.

균형은 불교의 근본적인 가치다. 균형을 중시하는 인간사에 대한 불교의 접근법은 북한에도 즉시 적용될 수 있다. 많은 서구 전략가들은 패권적 사고법으로 평양 문제에 접근한다. 그들은 그저 북한을 ‘압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북한 체제를 변화시키는 승리나, 최고 수뇌를 제거하는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처럼 그런 접근법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와 중동에 수십 년 동안 개입했지만, 일방적으로 개입할 때마다 나중에 ‘역류(blowback)’가 수반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단기적인 목표를 달성하더라도 조화를 깨면 새로운 문제, 특히 보통사람들이 희생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당연히 북한에 관한 한 핵무기를 제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차질이 생기면 더 큰 문제가 등장한다.

희망이 안 보일 땐 내면의 자아로 돌아가야

주미 대사로 재직할 때 나는 항상 불교의 지혜에 의지했다. 불교의 ‘마음챙김(念·mindfulness)’ ‘중도적 균형(balance)’ ‘순간 순간의 자각(awareness)’이 국제관계의 모든 측면에 적용될 수 있음을 알았다. 어떤 외교적 상황에서 중압감을 느낄 때, 상황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휴식을 취하면서 내면의 자아로 돌아가는 게 꼭 필요하다. 시간을 내 명상하고, 스스로와 평온한 관계가 되고, 평정심을 되찾으면 세상을 보는 시각에 놀라운 일이 생긴다는 것을 나는 발견하곤 한다. 중심을 잡기 전에는 심각한 결정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누구하고 함께 일하건 나는 ‘윈윈(win-win)’ 상황을 상상한다. 적수를 파멸시키겠다는 환상을 갖지 않는다. 조화의 추구 자체를 목표로 삼으면 전에 상상도 못했던 해결책을 발견하게 된다. 상호 연결된 오늘의 세계에서는 위험한 대결을 피하는 조화로운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가치 있는 불교의 개념 중 하나는 ‘무심(無心)’이다. ‘마음이 없음’보다 정확히는 ‘고정된 생각이 없음’을 의미한다. 무심은 마음이 모든 것에 열려 있으며 마음이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점령당하지 않은 상태다. 그런 상태가 되면 사람은 항상 중립적이고 차분하게 된다. 자아의 외부에서 오는 관점과 함께할 수 있게 된다. 편견을 넘어 상대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충격과 욕설은 마음에 구름 끼게 할 뿐

첫 번째 단계는 외교에서 감정을 제거하는 것이다. 상대의 발언이나 행동 때문에 흥분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여러분의 일부분이 아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언행을 반사하는 거울이 돼야 한다. 거울은 자신이 반사시키는 이미지 때문에 짜증을 내는 일이 없다. 이미지는 왔다가 가는 것이다. 물론 이미지들에 대한 자각은 하고 있어야 한다. 이미지에 담긴 메시지나 방향의 변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적인 반응에 대해서도 자각해야 한다. 그렇게 무심하게 대상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각할 수 있으며, 자신의 감정적인 반응을 알게 된 사람은 무심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마음을 대양(大洋)과 비유하는 것도 유용하다. 마음은 하루 종일 물결에 흔들리는 대양과 같다. 충격과 욕설은 여러분의 생각에 구름이 끼게 한다. 하지만 혼란스러움이 별로 없는 평정심 상태를 이루면, 대양은 하늘을 완벽하게 비출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감정이 휘젓지 못하는 마음은 온 세상을 놀라운 정확도로 비출 수 있다. 사물은 왔다가 간다. 사물이 오는 것과 가는 것을 내버려두면 본질을 잡을 수 있다. 자신과 상대편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관찰자가 될 수 있다. 대화 중에 에고(ego)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범하는 가장 흔한 오류는 어떤 사건이나 이미지에 대해 우리가 집착하고 매혹되는 것을 정념(正念)과 혼동하는 것이다.

불교에 따르면 명상은 모든 직업에 도움을 준다. 심지어 도둑도 명상을 하면 더 잘 훔칠 수 있다! 다시 말해 명상은 가치판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명상은 포커스와 자각과 관련된 것이다. 같은 이유로 불교의 수행은 그 어떤 특정 종교와도 충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과도 잘 어울린다.

어쨌든 도덕적인 판단은 관점의 문제다. 수천 년을 단위로 역사를 고찰하면, 어떤 사건이나 행위자에 대해 공평한 평가를 할 수 있다. 여러분은 실제 순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순간에 집중한 상태로 가치 판단을 한다면, 여러분이 옳다고 본 그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게 한 달이나 1년 혹은 10년 후에 밝혀질 수 있다.

언젠가 북한 정권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미국인을 만난 적이 있다. “우리는 북한을 신뢰할 수 없다. 대량살상무기가 있는 장소를 공격하고 체제 변화를 압박해야 한다.”

나는 우선 일반적인 의미에서 북한의 변모와 핵무기 제거라는 목표에 대한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점을 밝혔다. 그런 다음, 그의 논리를 연장해보기 위해 질문했다. 우리의 행동은 일반 북한 주민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나는 ‘북한 변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계속 되돌아가며 그와 의견을 나눴다. 어떤 형태로건 공영과 공존이 목표라는 내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또 한꺼번에 모든 것이 가능하진 않지만 윈윈 가능성이 저기 어딘가에 있다는 뜻을 그에게 전했다. 나는 그가 개진한 입장의 타당성 자체를 부인한 적은 없다. 나는 그저 철저히 검토할 필요가 있는 다른 접근법이 있다는 것을 그에게 상기시켰을 뿐이다.

北 인권, 마음챙김의 큰 틀에서 봐야

나는 그가 한 가지 목표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다른 여러 길을 고려하지 않고 말이다. 나는 그가 목표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남북한과 주변국 국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더 큰 관심을 집중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주미 대사로 일할 때 나는 한국이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충분히 우려하고 있지 않다는 취지의 말을 많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큰 의미에서 인권문제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다. 나는 북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비극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런 다음 우리가 만약 언론매체가 보도하는 이미지에 집착해 북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부당함 뒤에 있는 보다 큰 제도적·문화적 문제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충동적인 대응으로 의도와는 달리 인권문제를 중단기적으로 악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맥락에서 마음챙김이란 인권에 대한 진정한 의식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권이란 단순히 선거권이라든가 임의로 체포당하지 않는 자유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영양 공급이 부족하거나 아사 위험이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인권을 누리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 우리가 대답해야 할 핵심적인 질문이다.

불교는 모든 관계에 대한 장기적이고도 균형 잡힌 초점을 외교에 제공한다. 국제관계에서 진보는 달성 가능하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부처의 중도(中道·middle way)를 고려해야 한다. 국제관계라는 게임의 모든 참가자들에게 윈윈 가능성을 창출하고 극단의 선택을 피할 때 우리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전진할 수 있다. 한 가지 시각만을 고집하며 문제를 억지로 해결하려고 든다면, 또 공습에만 의지하려고 한다면 일시적인 것 이상의 결과를 얻기 힘들 것이다. 그 결과도 얼마 가지 않아 뒤집힐 것이다. 이런 정신으로 감행한 행동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낳기 쉽다.

충동적인 반응, 승자독식의 관점, 일관성 없는 정책 목표는 인류의 공동 목표에 대한 우리의 보다 깊은 헌신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그 점을 계속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력균형이 아니라 관점의 균형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가들 사이의 진정한 조화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 홍석현 중앙미디어네트워크 회장(전. 주미대사)


How Would the Buddha Handle North Korea? Mindfulness in Diplomacy

 

Seok-Hyun Hong
Chairman and CEO of the JoongAng Media Network

Posted: 10/24/2014  

Today's diplomacy is dysfunctional, and it seems as if the more we try to fix things without negotiations, the more serious the problems become. Recently the challenges in places like Iraq or Syria have grown so dire that we have to wonder whether we simply have the fundamentals wrong.

It may seem odd that this age of global integration would give birth to serious diplomatic tensions and occasionally to brutal conflicts. Part of the problem can be traced back to fundamental assumptions in the Western diplomatic tradition that have dominated international strategy since the seventeenth century.

The Western frame of mind that informs international relations assumes rivalry to be an essential principle. Throughout Western diplomatic history it has been assumed that one side must win over others through a winner-take-all struggle for hegemony.

But is such a vision appropriate for this age of the global community and of shared concerns such as climate change? Do all our exchanges have to take place in a Hobbesian world of all against all?

My experience in diplomacy suggests that the Eastern philosophical traditions of Daoism, Hinduism and above all Buddhism offer alternative approaches to diplomacy that have come of age. Buddhism places emphasis on harmony, rather than rivalry, and offers concrete strategies for engagement that help us to respond to the diplomatic challenges of an interconnected world.

The Buddhist approach does not naïvely assume that humans will always cooperate. Rather, it provides insights into the potential for true progress in all circumstances, a potential one can only grasp when one sees the duality and complexity of relations. There are deeper patterns in human relations that go beyond the simplistic impressions of good and evil that we find everywhere in the media, depictions that often apply and exploit an unstated religious framework in a Judeo-Christian interpretive matrix.

Many assume that diplomacy is a ruthless game of hegemony in which one just gives lip service to harmony as a strategy for justifying one's actions. But what if harmony was actually the goal of diplomacy?

To be sure, the concept of harmony among nations is not foreign to the Western diplomatic tradition. The historical diplomatic aim of achieving a "concert of Europe" would seem to appeal to just such a longing for peaceful, cooperative order. Despite the appealing metaphor, though, we would better understand this term as a euphemism, a pleasant name for the disposition of the affairs of small countries by the great powers, to the advantage of the latter. In the words of one historian, the "concert of Europe" implied a harmony that "really meant that the smaller nations were coerced into carrying out what the great powers had agreed upon among themselves."

Buddhism regards such hegemonic approaches to international relations as simply less effective in assuring security than simple dignity and a commitment to harmony. There is a deeper order beneath the surface of things and our sense of harmony, played out through small symbolic steps, can change the very nature of the debate in a positive direction.

The game of chess has come to symbolize diplomacy in the Western tradition. Just as in the game of chess, the Western strategist assumes a zero-sum framework wherein you must take the opponent's pieces and eventually checkmate his king. (Tellingly, the English word "checkmate" derives ultimately from a Persian expression‍‍ that means "the king is dead.")

But the more dignified approach to game-play in the East is based on the assumption of the possibility of co-existence and co-prosperity. Asian games like weiqi (Chinese chess) or baduk (known as go in Japanese) differ from Western chess fundamentally in that the game assumes a mutual harmony even in competition, rather than ruthless elimination of the enemy.

Western chess assumes only one simplistic victory based on hegemony: you go after the king and destroy him, at which point the game ends. But in weiqi, there are millions of ways of winning the game. You can win with a half-house, or you can win by several hundred houses. There is a winner, but the myriad of potential games unfolds like a dance, without an assumption of total domination. Success in weiqi comes from harmony and balance.

The metaphor of balance, like that of harmony, has long had a place as a term of art in the Western tradition of diplomacy. From the eighteenth century through the early twentieth, the concept of a "balance of power" guided the conduct of international relations among the European great powers. Acting in accordance with this principle, diplomacy wove shifting alliances and international understandings in an effort to prevent the rise to hegemony of any one power or bloc. Yet the nature of the balance sought was curiously limited. This approach recognized and served only the aims and interests of the established club of the great powers; other nations and peoples often played the role of pawns, or of the stakes of the competition, in the scramble for domination and colonial mastery.

Also, the constant need to reestablish equilibrium among the powers was made necessary by the very fact that no nation regarded the principle of balance as, in itself, a desirable goal or guiding principle. Rather, it was the means available to prevent rivals or enemies from achieving the unstated goal privately maintained by each participant in the game, namely that of reaching the top of the hierarchy of relative status and power and of exerting a determining influence in the affairs of the other competitors. In this light we see that the balance maintained by this system of relationships was of an unstable sort that could last only so long as circumstances did not allow one side to upset the balance to their own advantage: there was no commitment to balance, or to the benefits that could follow from it, as worthwhile ends in their own right. The dangers inherent in this unstable equilibrium can hardly be overstated, as clearly shown by the outbreak, one hundred years ago at this writing, of the First World War.

Balance is an essential value in Buddhism, and that approach to human affairs has an immediate application with regards to North Korea. Many Western strategists approach Pyongyang with a hegemonic way of thinking. They simply assume that you "go after " North Korea and win by changing the regime, or by getting rid of the top person. But, as we know from experience, such an approach does not necessarily lead to success. Decades of US intervention in Latin America and the Middle East have shown that each unilateral intervention carries with it the threat of later "blowback," the unforeseen consequences that complicate and escalate conflicts. Although you may achieve your short-term goal, you will so disrupt the harmony as to create new problems, especially for ordinary people. After all, where North Korea is concerned, eliminating nuclear armaments is important, but if that process is disruptive, it will lead to only greater problems.

In my own diplomatic career, I have constantly fallen back on the wisdom of Buddhism, finding uses for mindfulness, balance and awareness in all aspects of international relations.

It is essential that when one is distressed by a diplomatic situation, when the situation seems hopeless, to take time out and return to one's inner self. I find that taking time to meditate, to feel at peace with oneself and regain composure, can do wonders for one's perspective. One should not make a serious decision until one has been centered.

Whomever I may be working with, I want to imagine a win-win situation, rather than fantasizing about destroying my opponent. The act of seeking harmony as an end in itself can lead one to discover previously unimaginable solutions. And in today's interconnected world, we have no choice but to think about harmonious solutions that avoid dangerous confrontations.

One valuable concept in Buddhism is "mushim" which is an important part of my personal practice. Mushim means something like "no mind," or more precisely "no fixed thinking." It is a state in which the mind is open to all things and is not occupied by a thought or an emotion. In such a state, one is always neutral and calm, with a perspective from outside of one's self. In such a state one can move beyond one's prejudices and see one's counterpart as he is.

Step one is taking the emotions out of diplomacy. There is no reason to lose your temper at the remarks or the actions of your counterpart. They are not part of you. You should be like a mirror that reflects back those comments and actions. A mirror does not become irritated by the images that it reflects back. They come and go. But of course one should be aware of those images, those shifts in message and in direction. And one should be aware of one's own emotional responses. If one can keep up that detachment, can be aware of what is happening and of one's emotional responses, then one reaches a state of mushim.

An analogy to the ocean is useful. Your mind is like an ocean rocked by waves throughout the day. Shocks and insults cloud your thinking. But if one achieves an even, level state with few disruptions, the ocean can reflect the sky perfectly. So also can the mind reflect on the world with remarkable accuracy if it is not churned by emotions. Things come and go. When you can let things come and go, you catch the essence. You become a more objective observer of yourself and your counterpart as your ego fades from the dialogue.

The most common error we make is to mistake our obsessiveness, our fascination with events and images, with true mindfulness.

Buddhism suggests that meditation helps in any profession. Even thieves will do a better job if they meditate! That is to say that meditation is not a matter of value judgments. It is rather about focus and awareness. For the same reason, Buddhist practice does not conflict with any particular religion. Mindful practice mixes well with Christianity or Islam.

After all, moral judgment is a matter of perspective. If you think in terms of history on the scale of thousands of years, you can come to a judgment of an event or actor with some detachment. But you will be far away from the actual moment. But if you focus in on the moment and make a value judgment, what you thought was right may prove to be the opposite in a month, a year, or a decade.

Thus I once met an American who spoke about the North Korean regime and said to me, "We cannot trust North Korea, we should attack the WMD sites and push for a regime change."

In response, I started out by expressing my agreement with the goal in a general sense of transforming North Korea and eliminating nuclear weapons. But I then continued his logic, asking about what the consequences of our actions would be for ordinary North Koreans. I kept coming back to the ultimate purpose of change in North Korea, suggesting that co-prosperity and coexistence, in whatever form, was the goal. I also suggested that, although not everything is possible at one time, there is a win-win out there. I never denied the validity of his position. I only suggested that there were other approaches that needed to be exhausted first.

I sensed that he was obsessed with one goal without thinking out the variety of paths by which that goal might be reached. I tried to get him to focus more on process, on the issues faced by specific people in the North, in the South, in surrounding nations.

While I was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regime of the Roh Moo-hyun government, I received many comments to the effect that Korea is not sufficiently concerned about human rights in North Korea. My response then was to say: I'm very concerned with the human rights issues, in a big sense. I fully understand the tragedies that the people from the North suffer through.

I then explained that if we become obsessed with the images we see in the media, and fail to understand the larger institutional and cultural issues behind these injustices, then we are likely to respond impulsively and will inadvertently make human rights issues worse for the short and medium term.

In this sense, mindfulness means a true awareness of human rights as something more than just the right to vote or freedom from arbitrary arrest. We need to consider the millions of people who are undernourished or starving to death. How are we bringing human rights to them? That is an essential question for us.

Buddhism offers to diplomacy a focus on the long term and on balance in all relations. Progress can be made in international relations, but we must consider always the Buddha's middle way. To the degree that we can create a win-win for all players, and avoid extremes, we can go forward in a meaningful way. If we try to force the issue by insisting on one perspective and by falling back on military strikes, we are unlikely to get more than a temporary result that will soon be reversed. Action undertaken in this spirit could easily lead to a worse result than doing nothing.

Only by remaining mindful of how our impulsive reactions, winner-take-all outlook, and shifting policy objectives can undermine our deeper commitment to the common causes of humanity can we establish a balance, not of power, but of perspective, and in the process aspire to a harmony among nations worthy of the name.

The author is chairman of JoongAng Media Network -- one of South Korea's leading media groups, including the prestigious JoongAng Ilbo daily and a former South Korean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출처: HuffingtonPost]

   
기원사 법회에서 발제중인 필자(증평수행불자회 사무국장 이웅재 010-3434-0707)
   
 www.boknews.com
   
www.boknews.com
   
 
   
 
   
www.boknews.com

< 저작권자 © 복덩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관련기사]

복덩이웅재 복덩이뉴스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구석산 기원사 법회 발제자 이웅재
(증평수행불자회 사무국장)
010-3434-0707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복덩이뉴스 충북 증평군 증평읍 증평리 58  |  대표전화 : 010-3434-0707  |  팩스 : 010-3404-389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웅재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충북아00068  |  등록년월일 : 2011년 8월 26일  |  발행인 : 김정자   |  편집인 : 김정자
Copyright ⓒ 2011 복덩이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oknews@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