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이 내리면
- 이영창
아침이 이른 잠에서 깨웠다. 현관문을 열어 보니 세 계단 중 윗 계단까지 하얗게 눈이 덮여 있다.
만사 접어 두고 누가 밟아서 빙판이 되기 전에 눈부터 치워야 할 일 같아서 넉가래를 찾아 들고, 먼저 내 집 마당부터 치우고 다음에 이웃과 연결되는 길과 다음에는 큰길까지 치워나가자니 날이 밝았다.
이렇게 눈이 내린 하얀 날을 맞으면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사람들은 평온하고 포근하다고 하지만 가슴이 황량한 나는 쓸쓸함만 느낄 뿐이었다.
인생이란 꼭 풍요롭지 아니하더라도 가슴에 잔잔히 파도치는 추억이 있어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리라.
이렇게 눈이 쌓여 은빛 세상이 되면 혼자서 산행을 하고 싶다. 과장된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 낙수(落水)아래 부서지고 번져 가는 물방울처럼 생생한 기억들을 감당 할 수 없어 나를 산으로 가게 하는 것이다.
마치 지상으로 내려 앉은 구름을 밟는 마음 같이 신들린 사람처럼 눈산을 간다.
아마도 이런 증상은 아직도 완치되지 않은 상흔이 남아, 눈이 내리면 투명해지는, 그 반사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날, 그 날까지 졸업비를 내지 못해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담임 선생님이 교문까지 따라와서 잘들 가라고 손을 흔드는 것 같았으나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친구 아이들과 어울릴 마음도 아니었다.
혼자서 허름했던 증평극장에서 "언니는 말괄량이"란 영화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한테 대놓고 졸업장은 다음에 준단다고 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가난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별 수 없이 나도 가난에 억눌려 젊은 시절을 속수무책으로 흘려 보내야만 했던 엉긴
마음이 나의 혈행(血行)을 막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 시절은 왜 노력한만치 보상받지 못하였는지 ...
그 때의 삶을 뛰어 넘는 방법은 배우는 길이었다. 중앙고등강의록으로 독학을 시작 했다. 그리고 스물 다섯 살엔가 공무원 시험을 치루었다가 실패했다. 독학으로 꼭 성공해야겠다고 하면서도 정확하게 갈 길을 잡지 못했다.
그 때 나와 서로 마음을 기대며 책을 서로 바꾸어 읽던 선배 S형이 있었다. 그 S형도 역시 고시공부를 하겠다고 절로 떠나갔다.
S형마저 나의 생활권에서 사라지고 나는 살기 위해 농촌에 관심을 쏫기 시작했다.
그 뒤 몇 년이 지났을까.
S형도 고시공부를 물거품으로 돌리고 난데없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필가로 문단에 등단했다.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철저히 고립되어 갔다. 세상에 혼자 버려진 고아처럼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결과는 불운(不運)만이 나의 몫으로 남았다.
그 때부터 내가 나를 확인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아무도 나를 부추겨주지 않는다해도 힘겨운 삶의 길을 가야만 한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반란 심리가 생겼다. 그 반란은 나를 더욱 혼자이게 했고, 그런 사이에 설산(雪山)은 나와 인연이 되었다.
아주 짧게 말해, 가난 때문에 부서진 인연이 가슴에 남아 나를 힘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내 나이 지금 얼마인가. 오늘도 눈에 홀린 사람처럼 눈 쌓인 산을 간다.
그렇다. 산을 오를 때마다 이미 앞서간 발자욱이 언제나 있었고,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운명이었는지 나는 개척자가 되지 못하였다. 결국 누군가가 먼저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서 가고 있을 뿐이었다.
먼저 누군가가 살아간 모습을 밟으며 그렇게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한번 길을 잘못 잡아 산 속을 헤매게 되었다.
내가 개척해야 할 길이 예고 없이 주어졌다. 가슴을 조이며 얼마를 헤매었을까.
무심코 나의 뒤로 남는 발자국을 바라보고는 두려운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아무도 위로 할 리 만무한 오르지 하얗기만한 산 속, 아무리 보아도 길은 없다.
어찌해야 옳은 일인가. 방향 감각도 무디어 갔고 허기도 지기 시작했다. 세 시쯤이면 집에 도착하겠다던 나,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미리 삶을 개척하면서 앞서 살아간 사람들의 발자국, 그 길의 그 발자국이 얼마나 고독한 흔적이었단 말인가. 나는 세상을 보는 눈이 얼마나 미숙하고 용기가 부족한가.
얼마만한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정도 해가 기울었을 무렵이
되어서야 천신만고 끝에 사람의 자취를 발견했다. 나는 그제서 한숨을 돌렸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흠벅 젖은 몸은 찬바람에 한기를 느꼈다.
내 꼴이 무엇인가. 험한 산중에서 혼자라는 것, 세상을 혼자 버틴다는 것이 얼마나 까마득한 일이며, 그렇게 억세게 단련 하면서 살아가겠다던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나약한 것이었던가.
눈 덮인 산은 내게 말했다. "인생이란 그런 것" - 결국 정상에 올라서니 신비도 영광도 있을 리 없다. 오로지 눈과 바람, 하늘과 구름, 다 기울어진 태양뿐이었다.
다만 최선을 다해서 올라왔다는 것, 죽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과 처절한 몸부림에서의 해방감. 등에 밴 땀, 가슴이 졸아붙고 오줌 지리던 고독 속에서 애절하게도 사람이 그리웠던 일.
아! '이제는 나와 인연된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하며 살아야지' .. 휘진 몸을 바위에 걸치고 하늘을 보니 정말 하늘 가까이 온 것만 같다.
눈! .. 우리는 사랑했었다.
그녀는 어쩌면 눈이 사라진 계절에, 가난의 아픔을 보았는지 모른다.
버선짝 같은 이 땅. 어딘가에서 까맣게 나를 잊은 채 살아갈지도 모르는 사람, 가물가물 잊혀져가는 그리운 사람이 눈 꽃 핀 산을 사랑한다고 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눈이 오는 것을 더욱 애틋이 좋아할 것이다.
눈꽃 핀 산, 아름다움의 극치!
가슴을 열고 영혼의 눈으로 설경(雪景)을 보라.
내 지금까지 누구를 원망하고 저주했던가, 모두 부끄러울 뿐이다.
지금까지 가슴에 남았던 속된 생각들일랑 모두 접어두리라.
나는 이제 쉬어야 할 곳을 향해 하산(下山)해야 한다.
비록 때늦은 생각이지만 좀더 밝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리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