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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愛國志士) 이찬의(李瓚儀) 공(公) 이야기전주이씨증평분원> 묘소 참배 : 매년 3월 마지막 일요일 11:00 웃골산 선영(증평읍 남하2구 둔덕마을)
김정자 복덩이뉴스기자  |  jj2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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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21  12:04:58  |  조회수 :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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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증평분원(분원장 이상욱)은 
찬의공 기일(1919.3.30)을 맞아
매년 3월 마지막 주 일요일 11:00
묘소 참배를 거행한다.

 

애국지사 이찬의 공(公) 이야기

애국지사(愛國志士) 이찬의(李瓚儀) 공(公)은 1919년 3월 30일(음.2.29) 청안 장터에서 항일만세시위를 벌이다 일본 헌병의 흉탄(凶彈)을 맞고 순국했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집안나이)

고향에는 부인 안동 김씨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3살박이 아들 기영이 있었다.

이찬의 공은 전주이씨 집성촌인 둔덕마을(증평읍 남하2구)에서 1878년 7월 15일(호적상) 이창우의 삼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칠척장신에 힘이 장사였다.

   

청안동헌 만세운동유적비> 동헌은 일제침략 후 헌병주재소로 쓰였다하니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 얼마나 애통한 일인지 알 수가 있다. 

▶동헌이 주재소로 바뀌였다는 것은 동헌의 주인 또한 바뀌였을 것이고, 통치 목적 또한 바뀌였을 것이다. 이 어찌 피눈물 나지 않을 일인가?

   
 
공의 천하장사 이야기는 지금도 전설처럼 마을주민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마을 어르신들에 따르면 논에 물을 대는 수멍을 돌로 막아 만드는데, 공이 묘지 앞에 있는 비석만한 돌을 번쩍 들어 놓아 마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깃대 뺏기 마을 간 시합을 하면 이찬의 공이 깃대를 잡았는데, 기를 뺏으러 오는 상대 마을 사람을 한 손으로 집어 던졌다.

그는 천하장사였지만 형제 간 우애도 무척 깊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이/창/우)가 웃골산을 3등분하여 산 아래는 큰 아들, 가운데는 둘째 아들, 산 위는 셋째 아들이 땔감을 하게 했다. 그런데 힘이 센 이 공이 몸이 약한 동생과 바꾸어 산의 맨 위 부분을 차지해 땔감을 했다고 한다.

   
독립유공자(3.1운동) 이찬의 묘소 알림판과 훈장증(건국훈장 애국장)
   
 
이 공의 애국심 또한 남달랐다.

공은 항상 '나라를 위해 전장(戰場)에서 죽는 것이 가장 값진 삶이고, 마땅한 일이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시작된 삼일운동의 물결이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던 때 괴산에서도 뜻있는 사람들이 거사를 준비했다. 벽초 홍명희 선생은 1919년 3월 17일 - 18일 괴산 인산리 자택에서 스스로 조선 독립 계획을 고취하는 선언서를 집필하여 숙부 홍용식, 홍태식 그리고 아우 홍성희 선생과 더불어 3월 19일 괴산 장날에 충북 지방에서는 최초로 만세 시위를 펼쳤다. 홍명희 선생 등 20명이 검거되자 그 아우 홍성희 선생은 3월 24일 장날을 기해 다시 대규모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그런 항일시위 소식은 평소 남다른 애국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공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공의 부인 안동 김씨 할머니(1951년 작고)에 따르면 1919년 3월 30일, 청안장날을 맞아 이 공이 깨를 팔러 장에 간다고 나가는데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뭔가 굳은 결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 공은 깨자루에 태극기를 넣어가지고 길을 떠났다. 할머니는 아마 작심(作心)하고 길을 떠났던 것 같다고 말했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 노산 이은상 현충시 -

   

순국선열이찬의지묘(殉國先烈李瓚儀之墓)배부인안동김씨부좌(配夫人安東金氏祔左) - 배부인안동김씨부좌는 합장한 부인 안동김씨 할머니가 이찬의 공 왼편에 묻혀계시다는 이야기

   
 
당시 청안 항일시위는 군중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고 밤새 투석전이 벌어졌는데, 청안주재소에서 진압할 수가 없어 청주 본서 등지에서 일본헌병이 파견돼 진압했다.

헌병주재소를 부수는데 일제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이 때 천하장사 이찬의 공은 현청에 있는 큰 돌을 번쩍 들어 주재소를 박살냈다. 당시 시위참가자들에 따르면 그 돌은 성인 남자 3명이서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선두에서 맹렬하게 투석전을 벌리는 이 공은 당연히 일본헌병의 표적이 되어 일제의 흉탄에 쓰러졌다.

안동 김씨 할머니는 아침까지도 건장했던 남편이 흉탄에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 점 혈육인 아들 기영에게 무슨 해가 미칠까 애기만 부둥켜 안고 현장에도 못갔다고 한다.

아들 기영이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둘이 힘겹게 살던 이야기를 허허 웃으며 말해도 가족들은 눈물을 훔치며 들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헌병이 쏜 흉탄에 맞아 돌아가신 분이 6명이였고 다친 사람은 말도 못하게 많았다. 둔덕마을 집안사람들이 이 공의 시신을 찾으러 청안에 갔는데 분위기가 무척 살벌해 한밤중에 관청에 들어갔다. 관청에 가보니 돌아가신 분 6명을 거적으로 씌워놨는데, 체격이 남달리 컸던 이찬의 공은 발이 쑥 나와 있어서 바로 찾을 수가 있었다 한다.

집안사람들은 이 공의 묘를 둔덕마을 위 종산(宗山)인 웃골산 와암골(왁박골)에 썼다.

이 공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고 그리고 1986년 보훈청에서 묘역정비사업비가 나와 웃골산 성주사터 아래로 이장(移葬)을 했다.

   
충혼탑
☞ 우리지역 독립유공자 : 연병룡, 연병호, 임창무, 이찬의,  연병환 ...
   
 
김정자 이찬의 공 장손자 며느리(복덩이뉴스 사장)는 “공의 비문에 '오호 통재라'하는 말이 있다.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파 비문을 만들 때 ‘오호 통재라’라는 말을 넣었다.

나는 웃골산을 찾을 때마다 웃골산에 계신 그 분의 정신을 느끼려 한다. 그 정신은 푸르디 푸른 절개, 애국혼, 헌신과 열정 같은 것일 것이다. 나는 그 정신을 '웃골산 청년정신(靑年精神)'이라고 부른다. 나는 자식들에게 늘 ‘웃골산 청년정신’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내 남편 이강규씨도 자식들에게 할아버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할아버지를 늘 영광으로 생각했다. 이찬의 공 손자라는 사실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다. 이강규씨는 ‘잘 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 아니라 '잘 되면 할아버지 덕, 못 되면 내 탓'이라고 늘 말했다.”면서,

“애국자로 살아도 한 생을 사는 것이고 매국노 짓을 해도 한 생을 사는 것이다. 그렇지만 단 한순간을 살아도 남을 위해 살겠다는 각오가 있는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법이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정자 복덩이뉴스 사장(전주이씨증평분원 부녀이사)은 자식들에게 청안동헌에 있는 만세운동유적비를 자주 찾아가 고난을 함께 했던 김수백(金壽伯)·이태갑(李泰甲)·신강면(辛康勉) 선생 등을 기억하고, 독립유공자 후손답게 열심히 살라고 교육했다고 말했다.

   

증평군민신문 제24호 2013년 1월자 3쪽에 실린 증평군의 인물 독립운동가 이찬의 - 증평군민신문에서는 찬자를 삼수변 찬澯(맑을찬)을 썼다.

▶찬의 공 아버님(이/창/우)께서는 3형제(경의瓊儀/찬의瓚儀/영의瑛儀) 모두에게 전주 이씨 뿌리(王)를 생각하라고. 임금왕변을 붙여 이름을 만들었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찬瓚자를 쓴다.

▷독립기념관 자료실에도 찬(瓚)을 썼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 노산 이은상이 읊은 현충시가 뭉게구름처럼 웃골산을 아로새기고 있는 듯 했다.

이찬의 공의 뜨거운 애국심과 형제애는 후손들에게, 종친들에게, 증평지역에 깊고 넓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2015년 6월 6일(토), 애국지사이찬의선생기념사업회와 전주이씨증평분원, 이찬의 공(公) 후손들이 공동으로 거행한 찬의 공(公) 묘제
   
 
2017년 3월 26일(일) 전주이씨 증평분원

► 분원장 이상욱·부분원장 이동규 이문재
▻ 총무이사 이정진·재무이사 이홍섭·조직이사 이부희·문화이사 이웅재·교육이사 이강혁·청년이사 이인진·부녀이사 김정자·분회이사 이완재(둔덕마을) 이영성 이병식 이규홍·이사 이강구 이계철 이규흥 이근하 이기승 이동령 이범재 이병헌 이상우 이성섭 이영일 이완재(주공2단지) 이용종 이우섭 이은명 이증효 이진주 이창희 이채희 이충선 이호철
▻ 감사 이두진

   
삼일독립운동의거기념비
   

삼일공원> 삼일독립운동의거기념비 - 복덩이뉴스 박상은 부사장(이찬의 공 증손자맏며느리)이 충혼탑 참배 후, 삼일공원에 있는 '삼일독립운동의거기념비'를 가슴 뜨겁게 꼼꼼히 읽고 있다.

▶이 비문에는 3.1운동 당시 의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고 있다. 비문에 새겨있는 이찬의(李燦儀), 이태갑(李泰甲) 선생 ...

▷독립유공자 이찬의 공(公)의 찬자는 집안에서는 임금왕변을 넣은 찬(瓚)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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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의(李瓚儀) 애국장(1991)
- 3·1 운동 ♢ 충북 괴산 -
(독립기념관 자료실)

이 찬 의(李瓚儀) 1878. 7. 15 ~ 1919. 3. 31 이명 : 燦儀

충청북도 괴산(槐山)사람이다.

1919년 3월 30일 청안(淸安) 장날을 기하여 김수백(金壽伯)·이태갑(李泰甲)·신강면(辛康勉) 등이 주동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3,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주재소와 우편소로 행진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점차 시위군중이 격렬해져서 우편소와 주재소 등을 습격·파괴하자, 이에 겁이 난 일본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애석하게도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음.

   
 2003년 괴산 청천 솔뫼농장 - 애국지사 이찬의 공(公) 정신계승 후손의 날 행사
   
애국지사 이/찬/의 공(公)은 가족 화합과 단결의 구심이기도 하시다.
   

 애국지사 이찬의 선생 정신계승 후손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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