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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한 패배자 경순왕, 왜 임진강변에 묻혔나경향신문 이기환기자의 흔적의 역사
ing  |  leeungj@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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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09  14:10:50  |  조회수 :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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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무덤은 경주에 없습니다. 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임진강변에 있습니다. 그것도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50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경순왕은 왜 고향땅을 두고 머나먼 임진강변에 묻혔을까요. 거기에는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답니다. 경순왕을 흔히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에 고스란히 바친 무능한 군주로 치부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실리를 챙겼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우선 망국 후에도 43년을 더 살았고, 고려 태조 왕건보다 34년을 더 장수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의 후손들이 고려왕조를 지탱했습니다. 그래서 사가들은 경순왕을 두고 '승리한 패배자'라는 소리를 합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84회 주제는 '승리한 패배자 경순왕이 비무장지대에 남아있는 까닭' 입니다.        

 

 

■철책과 지뢰의 호위를 받는 경순왕

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적막하고 한가로운 농가의 모습이다. 그러나 경순왕릉 가는 좁은 길로 접어들자 금세 달라진다. 길 양쪽에「지뢰」라는 살벌한 이름표를 단 울타리가 펼쳐 있다. 남방한계선이다.
왕릉과 한 50미터나 떨어졌을까. 야트막한 산의 능선이 「남방한계선」이란다. 능선에는 심상치 않은 샛노란 군 시설물이 확연하다.
 아뿔싸. 무덤 앞「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 쓴 비석은 6발의 총탄을 맞았다. 아마도 6·25 전쟁 때의 일이겠지.
 또한 능역 오른쪽 하단에는 1986년 새로 건립된 1칸 규모의 비각이 있는데, 이 안에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정되는 비석 한 기가 있다.
한국전쟁 전까지 고랑포 시가지 대로변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이 비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이 땅이 수복된 뒤에 고랑포 초등학교 교정에 옮겨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의 비각 자리로 옮겨진 것이다. 
 높이 132센티미터, 폭 66센티미터, 두께 15센티미터인 이 비는 심하게 마모돼있어 완전한 판독은 불가능하지만 몇 자는 보인다. 왕(王), 응(應), 문(文), 수(守), 게(憩), 성(成), 신(臣), 어(於), 개(個) 등의 글자 만은….

 
한국전쟁 때 총탄을 맞은 기구한 경순왕릉비

  미상불, 남방한계선 바로 밑에, 그것도 지뢰밭을 무장호위 삼아, 비석마저 총상을 입은 채 누워계신 임금님. 그것도 고향 서라벌이 아니라 머나먼 이곳 장단이라니….
 얼핏 보면 누워서도 편치 않은「망국의 왕」다운 기구한 팔자다. 무덤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그렇다.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능의 존재가 실전(失傳)됐다가 조선 영조 때 후손에 의해 겨우 되살아났다.
 1746년 10월14일이었다. 경순왕의 후손인 김응호(金應豪)가 상소를 올렸다.
『신의 선조인 경순왕의 능묘를 오래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장단에서 그 지석 및 신도비가 나왔으나 왕묘에 대한 일은 사삿집의 무덤과는 그 사례가 달라서 벌목을 금지하는 절차와 석물을 세우고 수호자를 두는 일은 조정의 지시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영조실록』)
 임진왜란 이후 실전(失傳)된 조상의 무덤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747년 4월 영조는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린다.
『비지(碑誌)의 인본(印本)을 확인해보니 경순왕릉이 틀림없다. 1000년 가까이 된 이 무덤을 오늘날 찾았으니 기이하다 하겠다. 무덤을 다시 조성하라.』
 영조 때 찾은 비석에는「신라김부대왕지릉(新羅金傅大王之陵)」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영조 25년(1749년) 건립된 표석은 비수 전면에는「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이라 새겨있고 후면엔 87자 5행으로 이뤄진 음기(陰記)가 있었다.
『왕은 신라 56대왕으로~고려에 나라를 넘겨주었고~978년(고려 경종 3년 4월4일) 훙거(薨去)하니 시호는 경순이다. (고려)왕 경종은 장단의 옛 부의 터에서 남 8리 계좌의 언덕에 예로써 안장하였다.』
 이후 이 무덤은 왕릉급의 대우를 받아오다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다시 존재를 잃어갔다. 일제가 향사(享祀)제도를 폐지한 탓이었다. 그리고 8·15해방과 분단,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경기 연천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는 경순왕릉. 바로 뒤에 남방한계선이 있고, 지뢰지대임을 알리는 철책이 무덤을 호위하고 있다.

 

■태조 왕건보다 35년 더 산 망국의 임금
 하지만「똘똘한」군인 덕에 극적으로 부활한다. 1973년 1월 육군 25사단 관할 중대장이던 여길도 대위는 무덤 주위에서 총탄에 맞은 명문비석을 확인하고는 무릎을 친다.
 바로「신라경순왕의 무덤(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이었던 것이다. 여 대위는 즉각 상부에 보고했고, 이 소식은 경주 김씨 대종회로 통보됐다. 두 번 씩이나 사라졌던「신라 마지막 임금」이 국가사적(1976년 지정)으로 환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경순왕은 1000년 사직을 고스란히 고려에 바친 비겁한 왕으로만 치부될까. 우리는 흔히『천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 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ㆍ찰나)던가』하고 한탄했던 정비석의『산정무한(山情無限)』을 기억한다. 그러니 마의초식(麻衣草食)했던 태자와 견줘, 속절없이 나라를 들어 바친 아비의 무력함을 탓할 수밖에.
 그러나 역사가 그리 호락호락한가.
『비운 속에서도 슬프지 않았던 임금』(이병주),『백성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해낸 현실주의자』(조범환) 같은 평가도 만만치 않으니 말이다.
 나라를 바친 대가는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우선 백성들의「간(肝)과 뇌(腦)」가 흩어지지 않았고, 즉 백성들을 필패(必敗)의 전쟁에서 구해낸 것이 첫 번째였다. 훗날 김부식이『삼국사기』「신라본기」‘경순왕조’에 쓴 사론(史論)을 인용해보자.
『만약 힘써 싸웠더라면 필시 그 종족이 멸망되고 그 해독이 무고한 백성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미리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ㆍ현을 기록해 바쳤으니 고려 조정에 대한 경순왕의 공로와 백성들에 대한 은덕이 매우 크다 할 것이다.』
 고려는 나라를 바친 그를 정승공(政承公)으로 봉했으며, 그 지위 또한 태자보다 위에 있게 했다. 녹봉 1000석을 내렸고, 신라를 경주(慶州)라 칭한 뒤 그를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했다. 그 땅은 모두 정승공의 식읍(食邑)이 되었다.      

 
경순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옆에 지뢰지대임을 철책이 호위하고 있다. 

그는 또 망국 후에도 무려 43년이나 더 살았고, 왕건 보다도 35년이나 장수했다. 82살(97살 설도 있다)을 살았으니 천수를 누린 것은 분명하다. 그 뿐이런가.
 왕건은 경순왕에게『영원한 구생(舅甥·장인과 사위)관계를 맺자』고 청했다.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가 경순왕의 신부가 되었다. 경순왕은 사촌여동생(김억렴의 딸)을 태조에게 시집보냈다. 왕건과 김억렴의 딸 사이에 난 아들은 훗날 현종(992~1031년)의 아버지인 안종(安宗)이다.
 김부식은『현종은 신라의 외손에서 나와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에 왕통을 이은 사람은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음덕(陰德)의 보답이 아니겠는가.』(『삼국사기』)하고 기록했다.
 후에도 경순왕 계열의 김씨는 번성한다. 경순왕의 11대손인 김약선(金若先)은 무신정권기에 최충헌(崔忠獻ㆍ1149~1219년)의 아들 최이(崔怡)의 사위가 되어 세력을 떨쳤다.
 그의 딸은 원종(재위 1259∼1274)의 태후가 되어 충렬왕(재위 1274~1308년)을 낳는다.
 어디 경순왕 계열 뿐이랴. 같은 경주 김씨로서 독서삼품과로 유명한 원성왕(재위 785∼798년)의 후예인 김인윤은 고려의 삼국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었다. 그 후손들인 김원충, 김원정, 김경용 등은 고려 전기에 문하시중을 지냈다. 
 935년 고려 귀부(歸附)를 결정하던 대신회의에서 중립을 지킨 것으로 보이는 김위영의 후손들도 고려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무열왕의 후손을 표방한 이 가문은 훗날 김부필, 김부식, 김부의 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김부식의『삼국사기』는 누가 뭐라 해도 불멸의 역사서가 아닌가.
지금도 김알지를 시조로 모시는 신라 김씨의 분파가 450여개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약 90%가 경순왕의 후손이란다.
 지금도 해마다 봄·가을에 이곳에서 벌어지는 제사에 2000명이 넘는 김씨들이 경순왕을 기린다고 한다.
 그런 걸 보면 경순왕은 자손 복 많은「슬프지 않았던」임금이 분명하다. 그런 경순왕을 「현실론자」로 긍정 평가하는 학자들도 많다.
『나라는 약하고 형세는 외롭게 되었다. 죄 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간(肝)과 뇌(腦)를 땅에 바르도록 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삼국사기』)

 

 

■무너지는 천년왕국

경애왕이 견훤이 쳐들어오는 줄도 모르고「놀자판」을 벌이다 죽임을 당했다는 포석정. 하지만 경애왕은 이때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올렸을 것이다.    

경순왕 9년(935년) 10월이었다. 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은 뒤 고려귀부를 결정한다. 이것으로 보면 경순왕의 가없는「애민정신」이 부각되는 순간이다. 나라는 망했으되 그 백성은 살렸으며, 나라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후손들이 고려를 이어갔으니….「패배한 승리자」였다는 말이 나오는 까닭이다.
『어찌 1000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줄 수 있습니까.』
 마의태자의 통곡이 귓전을 때린다. 당연히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태자와 그 세력의 반발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경순왕은 속절없이 무너져 가는 천년왕국의 운명을 결정지어야 했다.
 좀 거슬러 올라가보자.
 천년사직에 접어들던 신라는 이른바 하대(下代)로 접어들면서 극심한 왕위쟁탈전과 경제혼란으로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진성여왕(재위 887∼897년) 3년(889년)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반란에도 어쩔 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고, 효공왕(재위 897∼912년) 9년(905년)에는 궁예가 신라를 침범했으나 방어할 힘이 없어 성만 지키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그야말로 명맥만 남은 나라가 됐던 것이다.

 

 
「포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이윽고 경애왕 4년(927년) 겨울 11월, 세력을 키운 후백제 견훤이 왕경(경주)을 쳐들어왔다.『삼국사기』「신라본기」‘경애왕조’에 따르면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여 즐겁게 노느라 적병이 들어 닥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만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왕비를 강간했으며 휘하들을 풀어 비첩들을 능욕하게 했다.
 

 

■경애왕은 술판을 벌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무리 정신없는 왕이라도 그렇지, 그 추운 겨울에, 그것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는데「놀자판」,「술판」을 벌였겠느냐는 반론도 제기된다.
 당시 신라에는 나라의 안녕을 비는 성스러운 장소인 포석사가 있었고, 포석정은 제사 이후에 음복을 했던 장소일 가능성이 짙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게 맞다면 경애왕은 당시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위해 제사를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바로『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귀족들의 혼례장소인 성스러운 곳인 포석사(鮑石祠)가 있다』고 했는데, 지난 1998년 포석정 인근에서 바로 포석(砲石)이라고 새겨진 명문기와가 확인됐다. 예전에는 복잡한 글자를 쓸 때 축약해서 쓰는 경우가 많기에 포석(鮑石)을 포석(砲石)으로 쓸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어쨌든 이 때 왕경을 마음껏 유린한 견훤은 후사로 경순왕을 옹립한다.(927년)
 견훤은 경순왕을 세우면서『나는 존왕(尊王)의 의(義)를 두터이 하고 사대(事大)의 정(情)을 깊이 하련다』고 머리를 낮췄다. 하지만 견훤의 목적은 경순왕을 어르고 뺨치면서 마음껏 요리하기 위해 왕위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사실 경순왕의 직위 무렵(927년 11월)에는 후백제의 세력이 강했다. 하지만 경순왕은 절대 견훤에게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정되는 비석 


 경도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신라의 군인출신으로 반역한 견훤을 인정하면 백성들의 반감을 살 수 있었기에 (견훤을) 기피했을 것』(김갑동)이다. 또 하나 꺼져가는 신라의 등불을 살려야 하는 경순왕으로서는 바둑으로 치면 끈질긴 형세판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재위 4년째가 되는 930년, 결정적인 사태가 발생한다.  
 고려가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아래서 견훤의 후백제군을 대파했고, 후백제 30여개 군이 잇달아 항복한 것이다.(『삼국사기』「신라본기」‘경순왕조’)
 승부의 저울추가 고려 쪽으로 기우는 순간이었다. 승기를 잡은 고려 왕건은 경순왕에게 사신을 보낸다. 사태를 저울질하던 경순왕은 반색한다.
 이윽고 이듬해인 931년 2월, 고려 왕건이 50여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경주 부근에 당도하자 경순왕은 백관과 함께「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이한다.
 왕건을 모시고 벌인 임해전(臨海殿) 잔치에서 거나하게 취한 경순왕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내가 하늘의 뜻에 부응하지 못해 차츰 환란을 불러일으키고, 견훤은 의롭지 못한 일을 제멋대로 하여 나의 국가를 없애려 하니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르오.』
 왕이 울자 신하들도 오열했다. 왕건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했다니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한편의 드라마이지 않는가. 왕건과 휘하의 병사들이 견훤과 달리「젠틀」한 모습으로 93일간이나 머물다 귀국하자 신라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단다.  
『견훤은 승냥이나 범 같았는데, 왕공(王公ㆍ왕건)은 마치 부모 같구나.』
 후백제와의 완전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아마도 93일동안 고려귀부와 관련된 끈질긴 협상을 벌였을 것이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비롯한 신라귀족세력의 안녕과 백성의 안위를 보장받았을 것이다.
 

 

■신라는 너무 늙었다

경순왕은 드디어(935년)『우리 백성들을 죽일 수 없다』면서 나라를 들어 항복하고 만다. 물론 조정에는『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내줄 수 있느냐』(마의태자)는 명분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별무신통.

태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인사를 전하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삼베옷과 나물음식으로 일생을 마쳤다. 마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처럼….  
 반면 경순왕을 비롯한 귀부파, 즉 신라의 정치지배세력은 고려에「신라의 정통성을 넘기는」조건으로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했다. 왕건으로서도 아무런 희생 없이 민족통합의 위업을 쌓은 것이니 경순왕의 존재가 얼마나 고마웠을까.
 귀부 이후 옛 신라 땅에서는 반역의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역사는 어차피 승자의 기록 아닌가. 그러니 경순왕은『비록 마지못해 한(나라를 바친) 것이지만 칭찬받을 만하다』 (삼국사기)는 고려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왕조의 수명이 너무 길었던 것은 아닐까. 중국의 경우 한나라 이후 300년을 넘긴 왕조가 없다. 그것도 이 민족의 왕조인 청나라가 296년이 최고이고, 당나라(289년), 명나라(276년), 서한(西漢ㆍ209년), 요나라(209년) 등 길어봐야 200~300년 사이이다.
 반면 신라(992년)는 천년을 버텼다. 왕조도 인간의 일생처럼 창업-쇠퇴-중흥-쇠운-망국이라는 흥망성쇠를 걷게 된다. 그 안에서 내부 모순과 갈등이 생기고 자연스레 왕조교체의 기운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신라는 그런 모순과 갈등을 안은 채 늙고 병들어 갔다는 분석도 있다. 이 또한 경순왕을 위한 변명 한마디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망국의 원죄까지 세탁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경순왕이 고랑포에 묻힌 까닭은?
 한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나라를 들어 귀부하여 갖은 영화를 누렸고,「고려=신라의 나라」에 이르게 했다는 경순왕은 왜 경순왕은 고향땅을 밟지 못했을까. 왜 경주가 아니라 고랑포구가 눈앞에 보이는 야트막한 산에 묻혔을까. 그는 고려 경종 4년인 978년 4월4일 훙거하여 옛 장단부 남쪽 8리 성거산에 예장으로 모셔진다.

 
고랑포구에서 바라본 임진강. 서해에서 올라올 때의 마지막 포구였다. 일제강점기엔 화신백화점 분점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에 편찬된 지리서인『신증동국여지승람ㆍ장단부조』는 경순왕릉은「장단부 남쪽으로 8리에 있다.(在府南八里)」라고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경순왕릉은 성거산(聖居山) 품 안의「계좌정향(癸坐丁向ㆍ묏자리나 집터 등이 계방(癸方)을 등지고 있는 좌향)」과 황계포란(黃鷄抱卵ㆍ닭이 알을 품고 있는 지세)이라 할 만큼 풍수상의 명당이라 한다.
 고려시대에 왕릉급의 관리를 받았던 경순왕릉은 조선건국 이후에도 국가의 은전이 베풀어진다. 그럼에도 남는 의문. 왜 경순왕릉은 고향땅을 등졌을까.
 우선 속전인『계림문헌록(鷄林文獻錄)』을 인용해보자.
『왕의 훙거(薨去) 소식(978년 4월4일)을 듣고 신라 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뤄 경주로 능지를 잡았다. 유민들 전원이 양식과 침구일체를 지고 다 따라 나서자 송도가 텅 빌 정도였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긴급군신회의를 연 뒤 구실을 찾는다.
『왕의 운구는 100리를 넘지 못한다(王柩不車百里外).』
 고려로서는 참으로「절묘한 구실」을 찾은 것이다.「왕의 대우」를 보장하는 대가로 운구의 임진강 도하를 막은 것이다. 왕의 장례를 옛 신라 도읍인 경주에서 치를 경우 그곳 민심의 향배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랑포구가 새삼 눈에 밟힌다.
 지금은 남방한계선과 불과 50여 미터 떨어진 궁벽한 곳이지만 지금의 잣대로 경순왕릉과, 그 코앞에 있는 고랑포 포구를 평가하면 안된다.
 임진강 상류로 가는 마지막 포구였던 고랑포는 뭍과 바다의 산물이 모이는 집산지였다. 일제 때 화신백화점 분점이 이곳에 있었을 정도였다. 고려 초에도 고랑포의 위상은 대단했을 것이다.
 왕건이 항복한 경순왕을 맞이한 곳이 바로 고랑포일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경순)왕이 백관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했다.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이 30여리를 이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두른 듯했다. 태조가 교외에 나가 위로하고 왕을 영접하고 위로했으며….』(『삼국사기』「신라본기」‘경순왕조’)
 30여리에 달하는 그 대규모 인원이 임진강을 도하해서 개경까지 가려면 이곳 밖에는 통로가 없었다.
또 하나 전설에 따르면 향수병에 걸린 경순왕이 고향을 바라보면서 눈물 흘렸다고 해서 이름 붙은 도라산(都羅山)이 이곳과 멀지 않다. 경순왕은 고향땅을 향해 건너는 황포돛배를 바라보며, 지금도 향수를 달래고 있을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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