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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월의 독립운동가 연미당 선생 -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한 여성 독립운동가"
보도자료  |  bok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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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04  11:53:09  |  조회수 :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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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연미당(延薇堂, 1908. 7. 15.~1981. 1. 1.) 선생을 2018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 선생은 1908년 7월 북간도 용정해관에서 근무하던 연병환(延秉煥)과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났다.

◇ 부친 연병환은 북간도 청년들이 1919년 3월 3일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배후에서 이를 지원하다 체포되어 2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립학교인 인성학교(人成學校)를 졸업한 선생은 1927년 7월 청년 독립운동가 엄항섭과 결혼했다.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연미당을 2018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한다.

 ■ 전 시 개 요 □ 

◇기 간 : 2018. 7. 1. ~ 7. 31. (한 달간)
◇장 소 :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
◇내 용 : 연미당 사진 등 6점 
 

◇ 결혼 이후 선생은 남편 엄항섭을 내조하며, 자녀들의 교육 나아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이와 같은 삶은 당시 독립운동가를 남편으로 둔 여성들의 일반적인 생활방식이었다.

◇ 나라를 잃은 여성들은 가장으로서의 삶과 함께 독립투사로서의 삶도 요구 받았다. 1927년 11월 상해에서 결성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 참여하기 시작한 선생은 상해여자청년동맹에서도 활동했다. 선생이 여기에 투신한 이유는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 독려와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서였다.

◇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일으켰다. 일제 관헌들은 한인들 색출에 혈안이 되었고, 선생은 가족을 이끌고 상하이를 탈출했다. 하지만 이는 고단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 임시정부가 중국 가흥 등지로 이동할 때, 자신도 돌보기 힘든 상황에서 노(老) 독립운동가들을 병간호했다. 가흥에서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이동휘와 장사 남목청에서 피습당한 김구 간호가 대표적이다.

◇ 독립투사로서의 삶은 이동과정에서도 이어졌다. 1936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재건 한국독립당 당원으로도 활동했다.

◇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자 항일과 독립을 위해 여성들을 결집하고자 한국혁명여성창립동맹을 발족하고 애국부인회를 재건했다. 특히, 선생은 중경 방송국에서 일본군 소속 한인 사병들을 광복군으로 전향시키기 위한 반일선전 활동을 전개해 갔다.

◇ 1946년 6월 3일 한국으로 환국했다. 선생이 해방이후 즉시 환국하지 못한 이유는 중국에 있는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 해방 이후 엄항섭의 내조에 힘을 쏟던 선생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남편이 납북되어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월북자 가족이라는 오해와 중풍으로 힘겨운 세월을 보냈던 선생은 1981년 1월 1일 순국했다.

◇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연미당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목 차 】

1.북간도에서 출생과 성장

2.상해 이주와 항일투쟁 참여

3.임시정부 피난과 활동

4.한국애국부인회 재건과 광복군 초모 활동

5. 광복의 준비와 환국


연미당(延薇堂)은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나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용정(龍井)과 상해(上海)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선생에게 부친 연병환과 남편 엄항섭의 영향은 절대적이었지만 한국이 처한 정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정부 요인들의 안위를 위해 묵묵히 헌신했다.

또한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 항전으로 결집하기 위한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 발 벗고 나섰으며 주의(主義)와 정파를 초월해 본격적으로 통합운동을 추진하며 앞서 여성 독립운동계 통합에 솔선수범했다.

독립운동가인 부군을 대신하여 자녀들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성장해 갈 수 있도록 양육, 교육하며 세대를 계승해 갈 수 있도록 했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동시에 그 자신 또한 항일투쟁전선에 직접 나선 독립운동가로서 활약한 다중적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이처럼 선생은 한국 독립운동이 깊이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제2의 독립운동 전선에서 봉헌한 헌신적인 독립운동가였다.

1. 북간도에서 출생과 성장

연미당(延薇堂:1908∼1981)은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하였으며 상해를 떠나 중경(重慶)에 머물다가 해방을 맞이해 고국으로 환국하기까지 항일투쟁의 제일선을 지켰다.

선생의 본명은 연충효(延忠孝)이며 곡산 연씨(谷山 延氏) 연병환의 맏딸로, 1908년 7월 15일에 북간도 용정(龍井)에서 태어났다. 미당(薇堂)은 아호이다.

1938년 임시정부와 함께 장사(長沙)로 이주했을 때부터 본명을 대신해 자신을 ‘延薇堂’이라 이름하여 독립운동계에선 연미당으로 알려졌다.

선생의 부친은 석촌 연병환(石村 延秉煥, 1878. 10.21∼1926. 5.14)이다.

연병환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곡산연씨 연채익(延彩羽)의 네 아들(연병환, 연병호, 연병주, 연병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구한말 관립외국어학교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897년 궁내부 주사로 임명되어 관직으로 나갔다.

이어 인천 해관봉판(海關幇辦)에 임명되어 복무하였고 부산 해관에서도 복무했다.

1901년 양지아문의 양무위원으로 서임되어 발령받기도 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이어 1907년 정미7조약이 늑결되고 1908년 통감부 치하에서 청주군수로 발령받기도 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대신 능숙한 영어실력과 세무직의 경험을 가진 부친은 만주로 건너가 1908년 7월에 중국 용정 해관에 취직했다.

이 무렵인 1908년 7월 15일에 연미당은 북간도 용정에서 출생했다.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중화민국이 탄생했는데도 부친은 중국 세관의 관리로 근무했다.

그러면서 1912년에 연길현에서 여자중학교를 설립, 교육에 종사했다.

그 당시 북간도 용정의 부친 집은 여러 애국지사들이 모여 간도 교포들의 문제와 교육, 독립운동 등을 논의하고 지원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부친 연병환은 세관직에서 고정적인 월급을 받았기에 경제적 여력이 있어 생활고에 빠진 독립운동가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다.

부친은 1907년 초에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 해외에서 생활하며 증평 고향에 자주 들릴 수 있는 처지가 못되자 중국에 귀화했다.

그리고 용정에서 김해김씨 김정숙(金貞淑)과 중혼하여 슬하에 선생과 남동생 연충렬, 두 남매를 두었다.

1910년 8월, 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부친은 증평 고향에 있는 형제들을 북간도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하여 4형제 모두가 용정으로 망명하였고 연씨 형제 모두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용정세관에 복무한 선생의 부친은 직무로 인해 얻는 정보를 독립운동계에 제공하고 빈한한 독립운동가들에게 운동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선생은 성장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주와 북간도,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한인사회에서는 한국 문제를 파리강화회의에 상정하기 위한 대표 파견을 논의하고 국내에서는 독립선언식을 개최하여 국제적 관심을 모으기로 결의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에서는 전국적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영향으로 북간도 용정에서는 3.13의거가 일어났다.

3.13의거가 일어나자 일본 영사관의 압박을 받은 중국 당국은 항일운동의 확대를 막고자 경찰을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했다.

당시 시위에 앞장섰던 17명의 청년들이 중국군의 총격을 받고 희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3.13의거 이후 북간도 일대 청년학생들은 연해주 한인들과 연대해 독립운동에 나섰다.

배일선인(排日鮮人) 검거에 본격적으로 나선 일본 영사관 경찰은 3.13의거의 배후 인물이며 북간도 지역의 항일운동을 지도하는 인물인 부친 연병환을 검거하고자 혈안이 되었다.

그러자 부친에게 우호적이었던 중국세관 당국은 연병환에게 천진(天津) 세관으로 전근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1919년 6월 18일 저녁, 송별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선 사이에 일본영사관 경찰이 연병환의 가택을 급습했다.

그리고 가택 수사 중에 마약이 발견되었다는 핑계로 연병환을 ‘아편음용 상습범’으로 몰아 체포했다.

조선총독부는 6월 17일에 ‘조선아편단속령’과 시행규칙을 제정 공포하고 본 법령에 의거해 그 이튿날에 연병환을 전격 체포한 것이다.

귀화 중국인 신분이었던 연병환은 2개월간의 취조를 받고 석방되었으며 바로 중국 세관직에 복귀되었다.

그가 만일 일제가 주장하듯 실제로 ‘아편음용자였다면 중국 세관직에 복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후 연병환은 1919년 10월 상해 세관으로 다시 전출하게 되었고 부친의 임지를 따라 연미당선생의 가족도 1920년 초에 상해로 이사하게 되었다.

연병환이 배일한인의 근거지인 상해로 부임한 사실을 인지한 일제는 중국당국에 그가 배일운동가임을 주지시키고 현직에서 퇴직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배일운동과는 관계없는 곳으로 이임시켜 줄 것을 상해 총세무사서(總稅務司署)에 강력히 요구했다.

이처럼 부친 연병환은 일제가 가장 주목한 배일한인이었던 것이다.

일제의 끈질긴 요구를 받은 중국 당국은 연병환을 복건성(福建省) 산도오(三都澳) 해관으로 전근시켰다.

는 한동안 산도오 해관에서 근무하다가 1923년에 진강(鎭江)해관으로 다시 옮겼다.

『곡산연씨족보』에는 연병환이 중국 해관직에 복무하고 있는 동안 만주 독립군인 중광단의 군사공작에 가담하여 무기와 군자금을 제공했으며 ‘청산리대첩 당시 숨은 공로가 적지 않다’고 하는 집안의 전언을 기록하고 있다.

가족이 상해로 이주했을 때인 1920년, 선생의 나이는 12살이었다.

북간도 용정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립학교인 인성학교(仁成學校)로 전학, 초등과정을 졸업했다. 인성학교 재학 당시 선생은 국어, 국문, 역사, 지리와 민족, 국가, 국토의식을 심어주는 투철한 민족교육을 받았다.

인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진강 해관에서 근무하는 부친을 따라 이사하여 진강여자중학교를 다녔다.

이후 부친은 1925년 7월 중국 하남군무독판공서(河南軍務督瓣公署) 고문에 임명되어 근무했는데, 부친이 어떠한 직무를 맡고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부친 연병환은 1926년 5월 14일 진강 임소(任所)에서 별세했다.

   

◇부친 연병환 장례식 모습◇
 

선생의 가족은 부친의 유해를 상해로 모시고 와서 장례를 치렀다.

오랫동안 중국 세관에서 공직생활을 하며 경제적으로 독립운동계를 지원했기에 그의 장례식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상해 공동조계 정안사로 외국인 공동묘지에 부친의 유해를 안장시키고 선생의 가족은 상해에 안착했다.

2. 상해 이주와 항일투쟁 참여

연미당은 모친 김정숙과 남동생 연충렬과 함께 상해에 정착한 이듬해인 1927년 3월 20일, 만 19세의 나이에 엄항섭과 결혼했다.

엄항섭은 엄주완과 김규식의 둘째딸 청풍 김씨 사이의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보성법률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의 검거를 피해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내무부 국내조사원과 법무부 참사(參事)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0년 항주(杭州)에 있는 지장대학[芝江大學]에서 수학, 1922년 졸업하고 상해 프랑스조계 공무국에 취업했다.

중국어, 프랑스어, 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인재로 주목받았던 엄항섭과 선생의 부친 연병환은 가까이 지냈을 것이다.

당시 기혼자였던 엄항섭이 부인과 사별한 후 선생과 혼인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일찍이 친분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엄항섭은 프랑스 조계 공무국에 근무하면서 임시정부 경무국장인 김구와도 긴밀히 연락하며 임시정부에 정보를 제공하고 또한 경제적 지원도 하였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엄항섭 군은 자기 집을 돌보지 않고 석오 이동녕 선생이나 나처럼 먹고 자는 것이 어려운 운동가를 구제하기 위해 불란서(프랑스) 공무국에 취직을 했다. 그가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倭(일본)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사건을 탐지하여 피하게 하고 우리 동포 중 범죄자가 있을 때 편리를 도모해 주는 것이었다.” 고 회상한 바 있다.

엄항섭은 1926년 12월 김구가 국무령에 취임한 이후 김구를 보좌하면서 동시에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과 함께 거주하며 그와는 돈독한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엄항섭이 부인과 사별하고 홀로 지내게 되자, 임정요인들은 엄항섭을 걱정하고 안타까워했으며 내부총장 이동녕은 엄항섭과 선생의 혼인을 적극 주선하며 중매에 나섰다.

그러나 선생의 모친은 극구 반대했다.

모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엄항섭과의 혼인을 결행했다.

홀아비 엄항섭이 미모의 처녀이며 초혼인 선생과의 혼인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부친 연병환이 살아계실 당시부터 집안끼리 왕래하였고 능력이 출중했던 엄항섭을 평소 흠모하고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1927년 3월 20일, 선생과 엄항섭은 많은 애국지사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했다.

   

◇연미당 엄항섭 부부 결혼사진◇
 

연미당·엄항섭 부부는 1927년 11월 상해에서 중국 관내지역 청년단체들과 함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 독립운동계에 유일당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었으나 독립운동계의 대동단결을 이루지 못했다.

만주지역 독립운동 세력과의 협동전선을 이루고자 1928년 9월 24일에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가 결성되자 부부는 청년동맹과 청년여자동맹에서 각각 활약했다.

통일협동전선운동의 혁명동지가 된 것이다.

엄항섭은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중앙위원에 임명되어 활약하였고, 선생은 재중국한인청년여자동맹원으로서 그리고 남편을 내조하여 여성계의 통일전선운동에 뛰어들었다.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4월말부터 5월에 걸쳐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임시정부에 참여한 청년들의 당면 과제는 독립전쟁 준비를 위한 군자금을 확보하는 일과 정부의 각종 포고 문서를 국내로 배포하여 임시정부의 존재를 적극 알리는 일에 집중했다.

이에 여성들은 각지에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했다.

여성계의 재빠른 움직임에 영향을 받은 상해 여성계에서도 1919년 10월 13일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 어양리(漁陽里) 2호에서 애국부인회를 결성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초기 독립운동계에서 여성과 남성의 활동 내용은 차이가 있었다.

남성들이 직접 독립투쟁 일선을 담당했다고 한다면 여성들은 후방사업 혹은 지원 및 선전활동 등에 집중했다.

남녀간에 사업 및 활동의 차이는 능력 보다는 역할의 다름 차이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이 장기화되고 격렬해지면서 여성들에게도 남성들과 동등한 역할이 요구되었고, 그 이상의 역량을 발휘하게 되면서 여성 독립운동 역량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그러나 상해 애국부인회 또한 좌익과 우익의 성향에 따라 여성계가 분리되는 경향을 보이다가 1928년 7월 20일에 애국부인회와는 다른 여성단체로서 한국여자구락부가 새로이 조직되었다.

이후 한국여자구락부는 상해여자청년동맹으로 재편되었으며 선생은 여기에 참여했다.

상해에 거주하는 여성 대부분은 독립운동가 가족의 일원이었다.

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복무하는 독립운동가 남편을 내조하며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 맡고 가족을 부양했다.

당시 여성들에게 단순히 남편을 따르고 가정을 지키는 아녀자로서의 역할만 요구된 것이 아니었다.

임시정부라고 하는 커다란 공적 공동체를 위한 공공의 이익과 대의에 헌신하는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고 봉사하는 일이 본분이 되었다.

여성들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자그마한 힘으로 독립운동이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그리고 임시정부가 정부로서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성심껏 뒷바라지했던 것이다.

독립운동세력간의 좌우익의 분열이 극에 달하여 독립운동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선생은 1930년 8월 16일에 창립된 상해 한인여자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상해여자청년동맹은 한국독립당의 남자청년단체인 상해독립운동청년동맹과 함께 활동하는 임시정부 여당인 한국독립당의 여자청년 부분의 단체이다.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면서 상해 청년여자교민에 대한 조사 및 상해 거주 교민들의 단합을 위해 활동했다.

항일 격문과 전단을 제작 배부하는 일과 임시정부와 교민단이 주관하는 3.1절 기념행사나 8.29 국치기념일 등 각종 기념일 회의를 진행하고 기념일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주관하는 일을 맡았다.

처음에는 고문제로 조직 운영을 했으나 1932년 말, 임시정부가 이동 중일 때에는 위원합의제(委員合議制)로 개정하여 운영했다.

1932년, 22살의 나이였던 선생은 한인여자청년동맹 5명의 임시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기에 앞서, 1931년 7월 2일 길림성 만보산(萬寶山)에서 장춘(長春) 도전공사(稻田公司)에서 조차한 미개간지 3만 3천묘의 수로공사를 둘러싸고 한국과 중국의 농민들이 충돌했던 이른바 ‘만보산사건’ 이 일어났다.

1930년대 초, 길림성 거주 한인들의 수는 거의 60만을 육박했는데,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이 높아갈수록 일제의 첨병으로 의심받은 한인들에 대한 적대심도 상승했다.

여기에 일제의 교묘한 이간책으로 한인들은 중국인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중국인들이 한인을 박해했다는 소식이 국내로 전달되자 분노한 한인들이 인천․경성․원산․평양 등 일부 도시의 중국 화교들의 상가를 파괴하고 화교들에 대해 공격하였다.

이같은 한·중 민족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가자 이 사태를 지켜보는 상해 한인들은 한·중 민중간의 오해를 풀고 한중반일공동전선을 강화해 가야 한다는 당면 과제에 직면했다.

이에 독립운동계는 만보산사건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사주에 의한 것이므로 냉철하고 현명하게 사건을 직시할 것을 중국 국민에게 호소하는 성명서를 7월 10일에 발표했다.

그리고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선후책을 협의한 결과, 남경정부에 대표사절을 파견해 국민당정부와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교섭에 들어갔다.

7월 12일에는 「동삼성한교문제(東三省韓僑問題)」라는 중국어 팜프릿을 제작하여 동삼성 각현의 관공서와 전국 지방관공서에 배부했다.

여기서 한인과 중국인들은 공존공영하여 공동으로 일제를 물리치고 한․중의 항일연합전선 구축해야 하는 당위성을 호소하고 중국당국과 직접 합작을 주도할 통일대당을 시급히 조직하고자 했다.

그리고 중국 당국과의 교섭을 진행시키기 위해 한인을 대표할만한 단체를 결성하기 위해 1931년 7월 18일에 당초 임시정부의 반대로 결렬된 바 있던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上海韓人各團體聯合會)를 재출범시켰다.

당시 동연합회에 참석한 단체는 임시정부를 비롯해 상해에 있는 한국노병회․흥사단원동위원부․상해교민단․학우회․애국부인회․여자청년동맹․독립운동청년동맹․병인의용대․소년척후대․소년동맹․선인야소교회․상업회의소․한인학우회․전차공사친목회․독락사(讀樂社)․공평사(公平社) 등이었다.

선생은 여자청년동맹의 대표로 참여했다.

상해 한인 각 단체연합회는 7월 20일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결의문을 채택하고 본격적인 선전활동에 들어갔다.

결의문에서 “삼천만의 조선민족은 총(總)히 중국의 반일운동에 합류하고 일본에 대한 전선을 같이 한다”고 결의하고 중국측과 적극 교섭하여 배일선전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상해 한인 각 단체연합회의 활동에 힘입어 임시정부도 각 신문사에 배일 전문을 송달하고 한중연합관계 기반을 공식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중국 신문기자들을 초대해 한인들의 입장을 설명했다.

한편 9월 25일에 임시정부 주관으로 개최된 한교전체대회(韓僑全體大會)에서 한․중연대의 실현, 동맹군 조직을 도모하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중국민중에게 한인은 일본의 대륙침략의 첨병이 아니라 중국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전선에 함께할 운명적 동지임을 인식시키기 위한 선전활동에 나섰다.

우선 만주사변(滿洲事變)의 진상을 밝히는 선전공작에 착수할 것과 그 대책안에 대해 협의하면서 첫째, 한인 각 단체연합회 명의로 중국의 각 기관과 각 신문사에 임시정부의 배일 통전(通電)을 발송할 것과 둘째, 각 단체대표회를 소집해 배일 중국 원조 공작 사무에 대해 토론할 것을 결의했다.

7월 21일 오후 3시에 개최된 회의에는 선생이 대표인 여자청년동맹 외에 9개 단체인 병인의용대, 노병회, 상해교민단, 학우회, 애국부인회, 독립운동청년동맹, 흥사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참석해 병인의용대 대표 박창세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8개 사업 추진을 결의했다.

그 내용은

1. 당일 안에 중국 각 관헌과 각 신문사에 전보를 발송하고

2. 중국 시민대회를 기하여 대표를 파견해 배일중국원조를 선전하고

3. 배일선전 삐라를 인쇄해 시민대회 때나 그밖에 기회가 있을 때 살포하고

4. 상해한인교민단과 본 연합회 명의로 재상해 한인대회를 소집하고 중국 각계 유지를 청하여 강연 토의하고 그 일시와 장소는 교민단에 일임하며

5. 소년척후대원에서 선전대를 조직,「격고중국민중서(檄告中國民衆書)」1만장 인쇄 살포하고

6. 3개 구획으로 지역을 나누어 애국부인회, 여자청년동맹, 독립청년동맹의 3개 단체가 연합회 명의로 의연금을 징수하고

7. 독립청년동맹에서 매일 또는 격일로 중일의 시국 경과를 담사(謄寫) 인쇄하여 상해 교포에게 반포 주지시키며

8. 중국 시당부(市黨部)에 교섭, 시민대회에 참석권을 얻고 교섭위원으로 박창세를 추대, 선발한다는 것이다. 각 단체연합회에서는 즉각 행동에 착수하여 위의 8개 사업에 착수했는데, 선생이 참여한 여자청년동맹에서는 각 단체연합회 명의로 의연금 모금하는 일을 맡았다.

한편 선생의 남동생 연충렬 또한 남편 엄항섭과 같이 한국독립당의 부분 단체인 상해한인청년동맹에서 활동했다.

동청년동맹은 1931년 1월 30일에 일제 시설을 파괴하고 요인 살해를 목적으로 한 상해한인청년당으로 재편되어 일제의 요주의 단체로 주목받은 바 있는데, 한국 국내와 일제 관동청 관내로 특파원을 파견한 바 있다.

상해에는 상해한인애국부인회와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 등 두 개의 여성단체가 활동 중이었다.

이들 여성단체는 일본이 1932년 상해를 침공했을 때 반일항전을 하는 중국군 19로군 부상 병사들에게 위문품을 보내는 구호활동을 전개했으며 1933년 3.1절 기념일에는 민족역량을 집중하여 독립운동을 완성하자는 내용의「제14주년 3.1기념에 제(際)하여」라고 전단을 배포했으며 8.29 국치기념일에는「국치기념(國恥紀念)」이라고 제목의 전단을 제작, 각 방면에 배포해 민족의식의 앙양에 노력했다.

3. 임시정부 피난과 활동

한국독립당이 창당되면서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청년단체인 여자청년동맹 활동에 주력하며 정부활동을 지원했다.

부군인 엄항섭은 1930년대 초에 한국교민단 의경대장이며 조선혁명당의 재무직을 맡아 활동 중이었고 침체와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조직된 임시정부의 특무조직인 한인애국단 조직에도 참여해 단장 김구를 적극 지원하였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의사의 폭탄의거로 상해파견군 최고 사령관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상해거류일본민단장인 가와바타(河端貞次)가 폭사하고 제3함대사령관, 제9사단장, 주중국일본공사 등이 부상당했다.

이로 인해 윤봉길의사는 현장에서 붙잡혔고 일본영사관 경찰은 프랑스 조계 당국의 협조를 얻어 프랑스 조계지 일대에 임시정부와 거류민단 사무소, 배일한인의 집을 급습, 한인들을 체포하였다.

엄항섭은 가족을 남겨두고 김구와 가까스로 상해를 탈출하였다.

선생의 맏딸 엄기선은 윤봉길의거 때 도시락 폭탄을 싼 보자기를 직접 어머니가 만들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의거 현장에서 수거된 도시락 폭탄을 싼 보자기는 윤봉길의사가 직접 일본인상점에서 구입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엄기선의 기억이 사실이라면 취조 과정에서 윤봉길의사가 선생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 진술을 했거나 홍구공원의 식장 안으로 의심받지 않고 입장하기 위해서 일본인들이 애용하는 도시락 보자기를 새로이 구입했을 것으로 보이며, 윤봉길의사의 진술이 사실 인지를 상해 일본군사령부에서 확인했을 것으로 보인다.

상해 의거가 일어나자 김구와 엄항섭은 일본군의 검거를 피해 탈출했다.

선생의 가족도 의거 다음날인 4월 30일, 일본 영사관 경찰의 가택 수색이 있기 전에 민필호의 안내를 받아 이동녕을 모시고 상해 탈출에 성공하여 가흥으로 이주하였다.

   

◇가흥 피난시절,
셋째 줄 제일 왼쪽이 연미당 선생◇
 

엄항섭은 임시정부와 중국 정부 간의 연락 임무를 맡아 바쁘게 일했기에 가족과 사적인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다.

그리고 선생은 부군을 대신해 이동녕과 이시영 등 임정 요인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피신생활에 들어갔다.

김구가 가흥 매만가 76-4호의 저보성(褚補成) 아들집에 피신해 있을 당시 선생의 가족과 이동녕과 이시영 등 요인들은 제1지구 범호진(笵湖鎭) 남대가(南大街) 88호에 은둔하고 있었다.

당시 폐결핵에 걸려 각혈하며 위중상태에 있던 이동녕을 선생은 극진히 간호했다.

그러나 이 시기 선생에게 불행한 사건이 닥쳤다.

상해한인청년당도 윤봉길의거 이후 상해를 떠나 남경으로 피신했는데, 청년당원들은 중심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고 한인청년당 결속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동생 연충렬과 동 당원 이규서가 일본 관헌의 밀정이란 혐의를 받고 남경 방면에서 1933년 1월경에 암살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선생에게 유일한 혈육이었던 동생의 죽음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936년부터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부군 엄항섭은 임시정부 결산위원으로 활동 중이었는데, 부부는 재건 한국독립당이 창건했을 때 함께 당원으로 활약했다.

1937년 12월 일본군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남경을 공격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호남성 장사(湖南省 長沙)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남경에서 둘째아들 엄기남을 출산하고 일본군에 의해 남경학살이 자행되기 직전 가까스로 임시정부가 이주해 있는 장사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이곳 장사에서 1938년 3.1절 기념식을 맞이했다.

기념식에서 김구 주석의 기념 식사와 함께 조완구의 임시정부의 역사 보고, 그리고 조소앙의 기념사에 이어 선생이 연사로 등장해 연설했는데, 연설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날 이복영의 합창이 있고 정부를 대표해 이동녕의 축사에 이어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 중국인들이 보낸 축사가 연이어 낭독되었다.

뒤이어 어린이들의 삼일절가 합창과 중국성당부와 장사시 시장, 제8로군 대표 등 중국인 내빈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이들의 축사 내용은 중·한 양국은 지금 공동의 적을 대적하는 터인즉 마땅히 공동 전선에서 협동일치 할 것과 한국의 승리가 곧 중국의 성공이요, 중국의 승리가 곧 한국의 성공이라는 요지의 내용들이었다.

참석한 내빈 일동이 구호를 외친 후 사진을 찍고 기념식을 마쳤다.

한편 저녁 7시부터 장사 청년회관에서 1천여 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유흥회가 개최되었다.

본 유흥회에서는 남녀 청년동지들이 여러 날 연습한 음악, 창가, 무용, 요술, 연극, 가곡 등 여러 프로그램이 성황리에 공연되었다.

이날 임시로 조직된 음악대의 공연은 연습이 충족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찬사를 받았다.

이어 3.1운동 당시 일어난 사실을 근거로 쓰여진『삼일혼』이란 극본의 연극이 공연되었다.

3.1운동 이후 20년간 한 사람은 군사운동에, 다른 한 사람은 민중운동에 전력했는데, 이들 두 사람이 나중에 힘을 합해 왜적을 물리친다는 내용이었다.

유흥회 공연을 끝으로, 시조, 춘향가(이복원), 육자배기(이달) 등 전통극 공연 또한 많은 관중의 환영을 받았다.

이처럼 선생을 비롯한 여성들의 열의와 정성으로 3.1절 기념식이 열성적으로 준비되었기에 그 어느 때의 3.1기념식보다도 성황리에 거행될 수 있었다.

한편 1938년 5월 6일 장사 남목청(楠木廳) 6호 조선혁명당 당본부에서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3당의 통일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동포간에 총격이 벌어지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3당 통일문제를 협의키 위해 각 당 대표인 김구와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 등이 모임을 가졌는데, 갑자기 난입한 이운한(李雲漢)이 권총을 난사해 제1발에 김구가 중상을 입었고, 제2발에 현익철이 맞아 현장에서 절명했다.

이어 제3발을 맞은 유동열이 중상을 입고 제4발을 맞은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김구는 총상을 입고 장사의 상하의원(湘雅醫院)으로 급히 이송되어 응급 치료를 받고 선생의 집으로 모셔졌으며 선생의 정성스럽게 간호를 받고 회복할 수 있었다.

한편 1938년 3월 10일, 도산 안창호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좌우익의 독립운동 세력은 도산의 서거 추모식을 거행했으며 임시정부에서도 안창호 서거 추도회를 거행했다.

이 추도회를 준비한 이도 선생이었다.

추도회 자리에서 선생은 이복영, 김정숙 등과 함께 애도가를 불렀으며 당시 추도식장 안은 비분강개한 분위기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1937년 2월, 한인 남녀 청년들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여 항일전선 구축에 나섰을 때, 연미당·엄항섭 부부는 1938년 10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결성하고 대원이 되어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했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중국의 선전공작대와 함께 활동했으며 일본군내에 복무하는 한국인 병사에 대한 초모 공작과 함께 군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위문활동과 선전, 홍보 활동에 주력했다.

특히 연극이나 무용 공연 등은 여성대원들에 의해 기획, 공연되었다.

한편 여성대원들은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 보고하는 일도 맡아했다.

선생의 맏딸 엄기선도 어린나이에 한국광복진선청년전지공작대 공작대열에 참가했으며 후일 공작대열에 함께 참여했던 박영준·이재현·노복선 등과 함께 한국광복군의 일원이 되었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유주, 셋째 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연미당 선생◇

임시정부는 진강(鎭江), 장사(長沙), 광동(廣東), 유주(柳州) 등을 거쳐 1939년 기강(綦江)에 도착했으며 1939년 5월 9일, 이곳에서 통일정당인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었다.

임시정부의 큰 어른인 이동녕은 줄곧 선생 가족의 간호를 받았으나 부군 엄항섭이 가족과 함께 중경에 자리잡는 바람에 기강에서는 정정화 가족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러나 병환을 떨치지 못하고 1940년 3월 13일에 기강 문사만(門沱灣) 임시정부 판공처 2층 침소에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과 정당의 통일을 유언으로 남기고 서거했다.

그해 9월에 임시정부는 기강을 떠나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수도로 정한 중경에 안착하였다.

앞서 중경에 도착한 엄항섭은 한국독립당집행위원, 임시의정원 외무분과 위원장, 한·중문화협회의 한국측 이사, 그리고 광복 시점까지 중앙위원회 선전부장, 김구주석 판공비서 등 요직을 역임하며 잠시의 휴식도 허용되지 않는 분주한 활동을 펼쳤고 선생 역시 남편 못지않게 많은 활동을 하였다.

4. 한국애국부인회 재건과 광복군 초모 활동

1940년대에 주의·이념을 초월하여 각 당파에서 임시정부를 지지 옹호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여성들도 이러한 흐름에 적극 참여해 민족통일전선운동을 적극 추진했다.

선생은 독립운동계가 좌·우파로 나누어져 진영과 노선 차이를 이유로 갈등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지켜보며 이대로는 대일항전에서 대동통일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통일전선운동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먼저 중경의 여성들은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창립하고 선언문과 강령을 발표하고 한국 여성은 혁명여성임을 자처하고 조국독립의 완성과 세계 평화의 실현을 위해 역량을 집중하고 중국 여성과 전세계 피압박 민족 여성들과 연계 분투할 것을 다짐했다.

당시 선생은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출범했을 때 임원을 맡지는 않았으나 측면에서 그 활동을 열렬히 지원했음은 물론이다.

한편 1943년 2월 23일, 각 정파의 여성들 50여 명은 임시정부 집회실에 모여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대회를 개최했다.

3.1운동 이후 국내는 물론 미주와 상해 등지에서 결성되어 활동한 애국부인회의 애국활동을 계승하고 여성으로서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애국부인회를 재건한 것이다.

이제 여성들은 남성을 지원하고 부군을 내조하는 차원이 아닌 민족해방운동의 전사로서, 그리고 조국 광복과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주체로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 통합과 조국 독립을 달성해 나가야 할 역사적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분명한 역사적 임무와 시대의식을 자각한 것이다.

본 대회에서는 민족혁명당의 좌파 독립운동계의 주력인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의 부인인 김순애를 주임으로, 그리고 부주석에는 방순이를 선임했다.

선생은 조직부 주임에 선임되어 실무 조직의 책임을 맡았다.

각부 주임으로는 서무부 주임 최소정(최선화), 선전부 주임 김운택, 재무부 주임 강영파, 사교부 주임 권기옥, 훈련부 주임에 정정화가 각각 선출되었다.

재건 한국애국부인회는 대일전선에서 부상당한 부상병과 무력항쟁을 준비하는 한국광복군 위문 등 후방에서 광복군과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일을 적극 수행했다.

재건 한국애국부인회는 “1. 나는 한국의 여성이다. 2. 나는 조국 광복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 3. 왜놈은 나의 원수이다. 4. 전민족의 단결을 위하여 먼저 한국의 1천5백만 여성은 굳게 뭉쳐 국가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하여 노력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중경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내외 여성 동포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였다.

당시 재건 한국애국부인회는 한국의 전인구를 3천만 동포로 보고 여성의 수를 그 절반인 1천5백만 명으로 계상하고 모든 여성들이 당파, 사상을 불문하고 일치단결해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대한독립과 민족해방 완성의 거룩한 제일보를 삼자는 결의를 다지는 선언서와 함께 7개항의 강령을 채택, 발표하였다.

여성들에게 있어서 대한독립과 민족해방의 완성 방향은 남녀가 정치·경제·사회·문화 제 분야에 실질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향유하는 '민주주의 공화국' 건설에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1. 국내외 부녀가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 및 남자와 일률 평등한 권리와 지위를 향유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공동 분투하기로 함

2. 혁명적 애국부녀를 조직 동원하여 국내외 전체 부녀동포의 각성과 단결을 촉성하며, 나아가 전민족의 총단결과 총동원을 실시하기 위하여 노력하기로 함

3. 전민족해방운동을 총 영도하는 혁명적 권력구조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옹호하기로 함

4. 부녀의 정치·경제·교육·사회상 권리 및 지위 평등을 획득하기에 적극 분투하기로 함

5. 부인의 정치·경제·지식의 보급 향상과 문맹퇴치 및 문화수준의 제고와 특히 아동 보육 사업에 노력하기로 함

6. 직업상 부녀의 권리 및 지위의 남녀평등과 특별대우 향유의 획득에 노력하기로 함

7. 전세계 반파시스트 부녀의 국제적 단결을 공고히 하여 전세계 부녀의 해방과 전인류의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쟁취하기 위하여 공동 분투하기로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일제의 패망과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두고 여성들은 전민족의 총단결과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기본적인 입장에서 나아가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목전에 두고 여성의 권리와 지위향상, 남녀평등과 부녀의 해방이라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표명함으로써 새로운 국가건설의 주역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천명하였다.

선생은 재건 한국독립당의 5개 구역 조직 중 부군이 소속된 제 1구(區)가 아닌 제 2구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부군 엄항섭은 광복군과 미국 OSS 특무대가 합동으로 한국진공작전을 추진할 때, 김구 주석을 보좌하며 OSS와의 한미합동훈련 유치를 위해 전력투구할 때, 선생은 후방 활동에 진력하였다.

1944년 중국 국민당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의 협조로 결성된 대적선전위원회(對敵宣傳委員會)를 통해 애국부인회 조직부 주임의 직임으로 중경 방송국에서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을 담당했다.

전쟁에 끌려온 일본군대 안에 한국인 사병에게 한국말 방송을 하여 임시정부 활동상황을 알리고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당시 전선에서 중국군에게 포로로 잡힌 일본군 중에는 한적(韓籍)의 한인포로들이 상당 수 있었다.

이들과 함께 일본군영을 탈출해 광복군진영으로 들어온 한적병사들을 광복군으로 초모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는데, 선생을 비롯한 한국애국부인회 여성들은 한적 병사들에게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으로 합류할 적극 권유하는 초모공작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또한 한국애국부인회 여성들과 임시정부 요인 자녀들은 위문금품을 마련하여 전선에서 활동하는 항일 군인들을 위문했으며, 중경 토교(土橋) 깊은 산 계곡에 소재한 일본군포로수용소를 방문해 일본군 포로 중 한국 국적을 가진 사병들을 위문했다.

당시 위문공연에서 ‘나의 살던 고향’, ‘푸른 하늘 은하수’, ‘3.1절노래’, ‘군가’들을 불러 한적 병사들의 민족 감성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애국심을 자극해 공연장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한국애국부인회 여성들은 식민지 한국과 국외 한인사회에서 크게 히트한 대중가요인 ‘타향살이’ 노래를 배워 임정요인들한테 들려주기도 했다.

여성들의 위문활동과 문화공연, 그리고 초모활동은 한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독립된 조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 같은 여성들의 활동은 가까운 시일에 일제 패망이 예견된 가운데 흔들림 없이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5. 광복의 준비와 환국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져 감에 따라 광복을 준비해 가고 있던 중경 한인사회에 종전 후 한국을 신탁 통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미국과 영국의 최고 지도자들이 워싱턴에서 회담을 갖고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세계 평화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국을 국제 감시 아래 두기로 했다는 이른바 신탁통치의 소식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한국애국부인회를 비롯한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무정부주의연맹, 한국청년회 등 6개 대표 정당 및 단체들이 1943년 5월 10일에 재중국 자유한국인대회를 개최하였다.

광복 이후의 한국 독립 문제에 외세가 개입함으로써 정치적 혼돈이 초래될 것을 우려한 한인들에 의해 추진된 본 대회는 광복운동 진영의 단결을 내외에 크게 과시하고 한국민의 광복을 준비하는 모습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좌우익의 각 정파 세력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때 선생은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한국애국부인회 대표로 참석했다.

본 대회에서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홍진(洪震),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충광(金忠光),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규광(金奎光), 무정부주의연맹의 유월파(柳月波, 유림), 한국청년회의 한지성(韓志成) 등과 함께 주석단의 일원으로 추대되어 대회를 주도했다.

이 자리에서 각 단체의 대표들과 함께 어떤 외세의 압박과 간섭도 반대할 것을 결의했다.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은 마땅히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자유한국인대회 선언문’과 ‘각 동맹국 영수들에게 민족의 영구한 생존발전과 전인류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찾기 위해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한다’는 한민족의 굳건한 의지와 각오를 전하고 전후에 한국을 국제 감시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요구에 위배되며, 임시정부의 국제적 합법적 지위를 승인해 주기 바란다는 성안의 전문을 발송해 한민족의 완전 독립과 임시정부의 승인을 국제사회에 촉구했다.

패전이 짙어짐에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던 일제는 두 차례의 원폭 투하를 받은 후인 1945년 8월 15일에 마침내 항복하였고 조국은 광복되었다.

엄항섭은 가족을 중국에 남겨둔 채 그해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 제1진으로 환국하여 건국사업에 뛰어들었다.

선생은 아이들과 함께 이듬해인 1946년 5월, 이범석이 이끄는 광복군 제2지대원들과 함께 미군이 제공한 군함 LST (Clnatan Clay)편으로 인천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당시 인천지역에 콜레라가 기승을 부려 상륙하지 못하고 부산으로 가서 부산항에서 일주일을 보낸 후에야 다시 인천항으로 와 6월 3일 상륙 수속을 끝내고 입국할 수 있었다.

선생 가족은 김구가 거처하는 경교장에서 일주일을 보낸 후 성북동 산꼭대기 별장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곳으로 이사했다.

엄항섭은 한국독립당의 국내지부를 건설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김구를 도와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민주의회 의원으로 활약하며 1947년 3월에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소재한 원효사에서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교육 강사로 활약하며 전국 각지에서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 건국의 중견 일꾼을 양성하고자 했다.

1948년에는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지지하고 남북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참가해 민족통일의 신념을 수호하고자 했으나 남북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광복 후 고국으로 귀환한 선생은 특별한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오로지 부군 엄항섭의 활동을 내조하며 가족을 돌보는 일에 몰두했으나 6.25전쟁의 발발은 선생의 민족통일의 염원을 완전히 배반하였다.

미처 피난가지 못한 채 서울에 갇히게 된 선생은 부군과 아이들과 함께 한강을 건너 남편의 고향인 여주로 내려가던 중에 인민군에 붙잡히게 되었다.

엄항섭은 가족을 고향 여주로 내려 보내고 자신은 조완구,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김붕준, 윤기섭, 유동열, 명제세, 박건웅, 원세훈, 안재홍 등 인사들과 함께 납북되었다.

북한에서 엄항섭은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임위원 겸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며 통일운동을 전개했으나 1962년 7월 30일에 심장병과 고혈압이 악화되었고 이로 인해 타계하였다.

엄항섭은 “내가 일 욕심이 많아 그동안 여러 사람과 다툰 것이 후회되오. 통일을 못보고 먼저 가게 되어 억울하오. 통일의 제단에 한 줌 흙으로 바치고 싶소”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선생은 해방 후 조국을 찾아왔으나 자신의 친족들의 원적지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가족들이 자리잡았던 서울 중구 도동 1가 127의 29번지 주소를 자신의 호적 출생지로 신고해 올렸고 1950년 5월 27일에 와서야 서울 중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일어난 6.25전쟁 때에 남편이 납북되자 월북자 가족으로 오해를 받아 결코 평탄치 못한 역경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들을 훌륭하게 성장시켰지만 갑자기 찾아온 중풍으로 인해 노년의 여생을 부자연스러워진 육신을 이끌고 어렵게 살아가야했다.

선생은 1981년 1월 1일, 7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연미당·엄항섭 부부는 1929년 맏딸 엄기선(嚴基善, 이명 嚴琪梅 : 1929. 1. 21~ 2002.12. 9)이 출생한 이후 맏아들 엄기동(嚴基東, 1931년 상해 출생), 임시정부 피난기간 중에 둘째아들 엄기남(嚴基南, 1938년 남경 출생), 둘째 딸 엄기란(嚴基蘭, 이명 엄기선, 1943년 가흥 출생), 셋째딸 엄기(嚴琪, 이명 嚴琪珠, 1944년 중경 출생), 그리고 해방 이후 1947년에 막내딸 엄기원(嚴基元, 서울 경교장 출생)이 태어나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가족사진, 1945년◇
 

부군 엄항섭이 자진 월북했다는 오해로 인해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으나 이후 납북 과정에서 본인 의사에 반해 납북된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남편에 이어 선생도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맏딸 엄기선 또한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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