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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선생 생가 안내판과 생가 내 공훈비 문제, 그리고 연병우 선생의 실체에 대해복덩이뉴스 연창흠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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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2.18  19:56:05  |  조회수 : 2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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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선생 생가 앞 문화재 안내판과 생가 내 공훈비 문제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연병호 선생 생가 앞에 설치된 문화재 안내판은 완전히 오류만을 나열한 것으로 애국지사를 모독하는 안내판입니다.

안내판의 잘못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지적했음에도 증평군에서는 금년 하반기 학술대회를 개최 시정하겠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틀린 것을 정확히 지적했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무슨 학술대회를 개최하겠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틀린 내용의 문화재 안내판을 고치는데, 학술대회가 왜 필요한 것이지 모르지만 무사안일의 대표적 사례라 판단됩니다.

그리고 생가 좌측편에 세워진 연병환 선생의 공훈비도 날조돼 있는데, 시정(철거)해 줄 것을 건의하니 문화재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철거하겠다고 하는데 아니 그 공훈비가 문화재라는 말입니까?

잘못된 것은 군수의 판단으로 철거내지 시정을 해야지 어찌 학술대회가 필요한 것이며, 어떻게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받아야 하는지 도대체 군민의 정당한 건의를 묵살하는 오만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을 참고하여 반드시 시정되도록 힘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생가 앞 문화재 안내판의 문제점

   
 
근간 연병호 선생 생가 앞에 설치한 문화재 안내판에 많은 문제점이 있어 시정을 요구하니 내용을 검토해 잘못된 사항은 즉각 바로잡아주시고,

올바른 것이라면 그 근거를 제시해 상호 오해가 없도록 조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역사를 사실인양 버젓이 문화재 안내판에 기재함으로써 지방자치단체가 역사를 앞장서서 왜곡하는 과오를 범하는 행위는 부끄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고 판단됩니다.

잘못되었거나 왜곡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가. 내용 중 위에서 6번째 줄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 후 조국에 돌아와...”라고 적혔으니 ‘상해임시정부’는 나라 명칭을 넣어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표기해야 올바른 것이라 판단됩니다.

나. 위에서 6번째 줄 ‘조국에 돌아와..’는 ‘그해 3월 국내로 잠입해’라고 표기해야 올바른 것이며, 7번째 줄에‘청년외교단’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라야 합니다.

다. 아래서 8번째 줄 ‘1921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북경에서 독립혁명당을 조직했으며,...’라고 했는데, 독립운동사에 독립혁명당이라는 단체는 없었으며, 연병호선생이 조직한 단체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그 근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 아래서 6번째 줄에 “조선총독부로 인계된 후 8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과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라고 했는데, 사실은 1차로 1920년 6월 29일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사건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2차는 1937년 6월 3일 한국혁명당과 신한독립당 조직과 관련하여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으나 6년형으로 감형되어 도합 9년을 옥고를 치렀던 것입니다.( 「애국지사연병환·연병호」 전기, 2013, 애국지사연병환·연병호선생선양사업회 발행, P426∼428 참조)

마. 역시 6번째 줄 선생이 조선총독부로 인계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형기도 8년이 아닌 9년이 옳고, 대전감옥이 아닌 대구감옥이라야 올바른 내용이라 판단됩니다.

바. 아래서부터 4번째 줄,“제헌의원 시절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해 관철시켰다.”라고 적혀 있으니 이는 사실과 다른 중대한 오류라 판단됩니다.

참고로 「大韓民國」이라는 국호 결정의 과정을 설명하면 大韓民國은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결의한 것으로 신석우가 먼저‘大韓'을 제시하자,

여운형은“대한은 조선왕조 말기에 잠깐 쓰다 망한 이름이니 부활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다시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며 공화제를 뜻하는‘민국'을 덧붙여‘大韓民國’을 국호로 채택했던 것입니다.

이어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공식 개원식을 갖고 30명으로 구성된 헌법기초위원회를 두고 6월 1일부터 활동을 시작해 7월 12일까지 헌법제정 작업을 벌이면서 국호를 결정하기 위해 논란이 많았으니 표결 끝에 기초위원 30명 중 대한민국이 17표, 고려공화국이 7표, 조선공화국이 2표, 한국이 1표를 얻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大韓民國’을 국호로 채택하고,

이날 열린 제2독회에 상정하여 재석의원 188명 중 찬성 163명, 반대 2명으로 가결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 국호로 결정된 것이며,

다만 연병호 선생은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했을 뿐입니다.

사. 끝에서 2번째 줄 ‘정부의 그의 공훈을 높이 사..’라는 문맥은 옳지 않다고 판단되며 ‘정부는 그의 공훈을 높이 사..’로 고쳐 적어야 할 것입니다.

아. 마지막 줄 ‘건국훈장 국민장’이 아니고 ‘건국훈장 독립장’입니다.(국가보훈처 연병호선생 공훈 내용 참조)

3. 비록 짧은 문장이지만 이토록 많은 오류와 부적절한 표기로 많은 이들로 하여금 역사인식을 그르치게 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사는 글자하나라도 임의로 해석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판단됩니다. 거듭 촉구하니 잘못된 내용은 즉시 바로 잡아주시고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는 그 근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병호선생 생가에 관한 건

○ 생가 좌측편에 설치된 공훈비(2개)는 날조된 것으로 즉시 철거되어야 마땅하다고 판단됨(별첨한 연병우는 누구인가? 참조)

○ 명덕정사 내 연병환·연병호 선생의 영정 게시방법은 개선되어야 할 것임(좀 더 우아하고 품위있게 제작하고 현재와 같이 카렌다 걸 듯이 벽에다 못을 박아 걸어 놓는 것이 아니고, 받들어 모시는 형태로 개선하는 것이 일생을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님들의 거룩하신 애국애족의 정신에 보답하는 것이라 판단됨)

   
 
○ 애국지사 연미당 선생은 연병환 선생의 친딸임이 확인되었으니 우리 고장 인물로 함께 선양하는 방안을 강구하여 주실 것을 건의드림 (2013년 발간 「연미당의 애국천추」 참조)

연병우(延秉祐)는 누구인가?

곡산 연씨 대동종친회에서 발간한 족보 3권 322쪽에 연병환(延秉煥)의 초명을 병우(秉佑)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들어 애국지사 연병환(延秉煥) 선생과 독립운동사에 있는 연병우(延秉祐)를 동일인으로 보는 이가 있으니 이는 중대한 착각이다.

특히 도안면 석곡리 연병호 선생의 생가 울안 좌측 편에 공훈비 두 개가 세워저 있는데,

하나는 연병우(延秉祐)의 공적을 연병환의 공적으로 미화시켜놓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독립운동사에 있는 연병주(延秉柱)의 공적을 마치 연병환의 둘째 동생인 연병규(延秉奎)의 공적으로 미화시켜 놓고 있으니 이는 중대한 착오로 즉시 철거함이 마땅한 것인데,

2012년 말 경 애국지사 연병환·연병호 선생 선양사업회에서 증평군에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공훈비를 철거 요청한바 있음에도 현재까지 방치하고 있음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단언하건데 연병우(延秉祐)는 본적이 함경남도 갑산군 동인면 신창리이며,

독립운동 당시의 주소는 중국 액목현 대사하동(額穆縣 大沙河洞)으로 회형(晦亨), 약천(若天), 두익(斗翼), 김기성(金基聖), 강석문(姜錫文) 등의 이명을 쓰는 인물이니 연병환(延秉煥)과는 전혀 다른 인물인 것이다.

1919년 6월 26일 재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국지의랑(菊池義郎)이 기밀 제76호로 자국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내용에“대한노인동맹단(大韓老人同盟團) 통신부장 강문백(姜文伯)과 부원 연병우(延秉佑)는”.. 이하 생략 ...,“연병우(延秉佑)는 함북 갑산군 동인면(咸北 甲山郡 同仁面)의 자로 이전에 청권(請權)의 건으로 당관에 출두한 적이 있는데 최근에는 소성(蘇城)방면에서 강택희(姜宅熙)와 함께 청어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에는 독립군자금모집에 관련된 피의자 강진삼(姜鎭三)의 심문조서에서도 ... 중략... “답, 그리고 음 五월 말경 咸南 德源郡의 縣面의 安菜亨을 재차 방문하여 돈 一원을 얻었다. 음 五월 말경 또 咸興邑내의 安基馨을 재차 방문하여 一원을 받았다. 그리고 음 六월 초경 北靑郡 居山面 立石里의 安炳鉉 집에 찾아가서 전례와 같은 말을 하며「지금 北間島로 가는 길이다」라고 했더니 근처의 安씨네들이 각기 밥 한 끼씩을 베풀고 安炳鉉은 돈 一원을 주었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咸北의「오시내」에 가서 양귀비 재배소의 노무자로 종사 했으나 음 九월 초경 경찰의 일제 검거가 단행되어 도주하여 甲山郡 同仁面의 延炳禹 집에 갔었다. 문, 延은 어떤 사람인가? 답, 延은 그 전에 北間島에서 서당교사를 하던 자인데 北間島 있을 때 지기 사이가 된 사람이다. 문, 延씨 집에서 무엇을 했는가? 답, 延에게도 역시 독립운동 얘기를 하여 돈 二원을 받고, 그리고 전번에 말한 安昌祐 집에 가서 광석 분석 의뢰를 받아 여비를 갖고 음 一一월 초에 咸興을 출발하여 安昌祐에게서 들었던 平康郡 楡津面 楡淵里의 高文河 집을 방문했다.「나는 安昌祐의 친형이다」라고 사칭하여 하룻밤 묵고, 돈 一원을 받았다. 그리고 平康郡내의 광산들을 순회 음 一二월 초 板橋面 明德里의 金華旭 집으로 갔다. 그 뒤로부터 얘기는 전술한 대로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29년 3월 21일자 중외일보 게재된 ‘朝鮮國民革命黨, 延秉祐 豫審 終決’이라는 기사 내용에서도 “작년 팔월경 간도(間島) 천보산 영사관분서(天寶山領事館分署)에 체포된 조선국민당(朝鮮國民黨)의 수령 연병우(延秉祐)에 과한 치안유지법위반(治安維持法違反)사건은 그간 간도총영사관 재판소(間島總領事館裁判所) 예심에서 심리하여 오던 중 지난 십삼일에 예심이 종결되어 심사일 청진지방법원(淸津地方法院)으로 일건서류와 같이 이송되어 불원간 당미에서서 공판에 부쳐질 터이라 하므로 전기 연병우는 본적을 함남 갑산군 동인면 신창리(咸南 甲山郡 同仁面 新昌里)에 두고 체포당시까지 액목현 대사하동(額穆縣 大沙河洞)에 근거하면서 회형(晦亨), 약천(若天), 두익(斗翼), 김기성(金基聖), 강석문(姜錫文) 등 각가지 이름을 가지고 ○○운동에 활동하였으며, 또 대동회집행부장(大同會執行部長)이 되어 활동하던 중 그와 같이 영사경찰에 잡힌 것이라더라.”라고 기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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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규호
사실과 근거에 의한 지적은 바람직한일입니다,,,그러므로 이를 바로 잡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2014-02-24 08: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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